전생 연분 24
“대왕대비마마. 중전마마 드셨나이다.”
문 밖에서 낮은 음성이 울렸다.
“… 들라하여라.”
문이 열렸다.
중전이 들었다.
걸음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문을 넘는 순간
시선이 먼저 닿았다.
이영.
아주 짧게, 그 자리에 멈추었다.
길지 않았다.
하나 그 한순간으로도 충분하였다.
이내 중전이 고개를 숙였다.
“…대왕대비마마를 뵈옵니다.”
그리고
“…영대군.”
짧게 불렀다.
이영이 고개를 숙였다.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말은 낮았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붙지 않았다.
대비가 입을 열었다.
“…영대군이, 부탁할 일이 있다 하여, 너를 부른 것이다.”
손이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중전. 거기 앉거라.”
중전이 고개를 숙였다.
“…예, 대왕대비마마.”
말은 단정하였다.
곧 자리에 앉았다.
이영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가깝지 않았고, 멀지도 않았다.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대비가 웃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영아.”
짧게 불렀다.
“…이제 말해보거라.”
이영이 입을 열었다.
“…할마마마.”
숨이 얕게 고였다가 가라앉았다.
이어—
“…어마마마.”
그다음 조금 더 낮게 떨어졌다.
“…소자,
마음에 둔 여인이 있사옵니다.”
그 말이 내려앉았다.
중전의 시선이 멈추었다.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
이영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씀 드리 온데,”
숨이 가라앉았다.
“금혼령이 내려진 이때에, 감히 청하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흐트러짐 없이 떨어졌다.
“…그 여인의 단자를 올리지 아니하고, 소자의 반려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한마디가대비전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전의 미소는 사라졌고, 시선만이 남아 곧게 이영에게 닿아 있었다.
대비는 온화한 미소로 그저 웃고 있었다.
“어느 집 규수길래,”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강아지가 이리 급한 것이더냐.”
“…참으로 어여쁜 아이겠구나.”
그리고
“…어느 집 여식이더냐.”
그 물음이 내려앉았다.
부드러웠다.
이영이 입을 열었다.
숨을 고르지 않았다.
“…현조판서 여식, 허연서라 하옵니다.”
그 이름이 조용히 떨어졌다.
중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멈추었다.
깊어졌다.
대비의 미소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다.
“현조판서 여식이라.”
아주 낮게 되짚었다.
“…그 아이가, 성정이 곧고 곱다는 것은, 내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 말이 내려앉았다.
대비의 음성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따뜻하였고, 부드러웠다.
그때 중전이 입을 열었다.
“영대군.”
짧았다.
허나 그다음 말은 짧지 않았다.
“나라의 세자빈을 간택하는,”
짧게 끊었다.
“중요한 간택이 오가는 이 시기에,”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어찌하여 네가, 혼사를 청하는 것이냐.”
그 말이 내려앉았다.
소리는 높지 않았다.
허나 가볍지 않았다.
잠시
정적.
이영이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짧게 불렀다.
숨이 고였다가 가라앉았다.
“…소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낮게—
“제 반려가 될 여인을 지키고자 하옵니다.”
ㅃ
그 말이 내려앉았다.
흔들림은 없었다.
“…그 여인은,”
짧게 끊고—
“이미 오래전부터,
소자와 정인으로 약조한 여인이옵니다.”
중전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영은 이어 말했다.
“현조판서 대감께도,
그 아이와 함께하겠다 말씀드린 바 있사옵니다.”
숨이 낮게 가라앉았다.
“허나, 갑자기 금혼령이 내려지며, 처녀 단자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사온데,”
말이 고이지 않았다.
곧장 이어졌다.
“판서 또한 올리려 하였으나, 소자가 올리지 말라 하였사옵니다.”
잠시
정적.
그 말이 무겁게 남았다.
“내명부의 소관이니,
이리 직접 청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말은 낮았다.
허나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잠시 숨이 고였다.
이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녀단자에는 형님께 어울리는
많은 여인들이 있사옵니다.”
그 말은 크지 않았으나 또렷하였다.
“허나,”
조금 더 낮게, 조금 더 깊게—
“소자는, 그 여인 하나면 되옵니다.
그 여인이어야만 합니다.”
짧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영이 고개를 숙였다.
“…할마마마. 어마마마.”
숨이 낮게 가라앉았다.
“소자, 다시 한번 청하옵니다.”
조금 더 또렷하게
“허연서를,소자의 반려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이 대비전 안에
깊게, 완전히, 내려앉았다.
아무도 곧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소자, 이미 아바마마께 아뢰었사옵니다.”
정적.
그 말 하나로 공기가 멈추었다.
이영은 멈추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도,”
“이미 윤허하신 일이라,”
짧게 숨이 스쳤다.
“그리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숨조차 쉽게 이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다 중전이 입을 열었다.
“영대군.”
짧았다.
허나 그다음 말은 짧지 않았다.
“네가 정녕,”
아주 낮게 시작되었다가
“여인 하나 때문에,”
조금 더 날이 섰다.
“…이리 나서는 것이냐.”
숨이 고였다.
“전하께,
이 사실을 이미 아뢰었다 하였느냐.”
시선이 깊어졌다.
“…네가 정녕,”
아주 미세하게
그 말이 내려앉았다.
허나 멈추지 않았다.
“전하의 뜻이라 하여도,”
짧게 숨이 섞였다.
“이 일은, 내명부의 소관이다.”
음성이 날을 세웠다.
그 순간 대비가 입을 열었다.
“중전.”
짧았다.
소리는 높지 않았다.
허나 그 한마디로 공기가 멈추었다.
“지금 어디서 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부드러웠다.
허나 거스를 수 없었다.
중전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다시 이영을 향하였다.
“…영아.”
조금 더 부드럽게
“그래.”
짧게 숨이 섞였다.
“너의 마음은, 잘 알겠다.”
그 말이 내려앉았다.
숨이 낮게 깔렸다.
“중전과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다정하였다.
허나 그 부드러움 아래에서
오늘의 자리는 그대로 정리되고 있었다.
“내일,”
조금 더 또렷하게—
“다시 입궐하여라. 아무 걱정 말거라 ”
그 한마디가 자리를 마무리하였다.
이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네, 할마마마.”
짧았다. 더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로 오늘의 청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