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꿈마차 4
오늘은 왠지 달콤한 것보다
씁쓸한 것이 더 어울리는 밤입니다.
신비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십니다.
입안에 남는 쓴맛이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마음 항아리 앞에 섭니다.
밤은 고요합니다.
마차 위로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고
항아리 속 보석들은
숨을 죽인 듯 조용히 빛나고 있습니다.
신비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넣습니다.
오늘 선택된 보석은
탁한 검회색을 띠고 있습니다.
빛을 거의 머금지 못한 채
조용히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 안쪽에는 금이 간 듯한 얕은 핑크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마음,
아직 식지 않은 감정,
그리고 깊게 상처 입은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 보석은 쏟아부은 시간의 보석입니다.
신비는 그 보석을 연료함에 넣습니다.
마차의 등불이 천천히 밝혀집니다.
또각, 또각.
말굽 소리가 고요한 밤길을 두드립니다.
꿈마차는 마음 정류소를 향해 천천히 달립니다.
정류장에는 한 여자가 서 있습니다.
그녀는 우는 얼굴도, 화난 얼굴도 아닙니다.
그저 모든 감정을 지나온 뒤에 남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신비가 조용히 묻습니다.
“꿈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여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마차에 올라탑니다.
마차 안에는 따뜻한 등불이 켜집니다.
신비가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아무 말이나 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한참을 말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엽니다.
“그 사람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겠다고 했어요.
도와주면 안되겠냐구요.
그래서 제가 대학 그만뒀어요.
알바를 여러 개 했어요.
생활비, 용돈, 옷, 먹는 거.
잘 먹어야 한다고 건강해야 한다고 제가 다 했어요.
그 사람 살 수 있게, 제가 다 했어요.
같이 살았어요. 부부처럼요.
힘들어도 내색 안했어요. 미안할까 봐.
그리고 그 사람은 저 사랑해 줬어요. 진짜로요.
일하고 오면, 안마해 주고, 미안하다고
자신이 성공해서 꼭 다 보답하겠다고.
그래서 믿었어요. 바보죠.
제20대는 다 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공무원이 됐어요.
너무 좋아했어요.
저도 같이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그날 전까지는요.
한숨을 조용히 내뱉습니다.
파트 시간 변경이 있어서 집에 일찍 들어갔는데
문을 열었는데 내 친구랑 그 사람이 같이..
벗고..있..었어요.
이해가 안 됐어요.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화도 안 나고, 소리도 안 나오고
그냥 뛰쳐나왔어요.
근데 나오니까 무너지더라고요.
눈물 나고, 미치겠고, 비명이 새어 나오고,
둘 다 죽이고 싶고, 제가 죽고 싶고
진짜 제정신 아니었어요.
근데 친구가 카톡이 왔어요.
“우리 3년 됐어.”
“미안.”
“근데 진심으로 사랑해.”
3년이요?
하.
3년 동안이나 저랑 살면서 저를 속였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남자에게 물어봤어요.
“왜 그랬어?”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널 사랑 안 하는 건 아니야.”
근데
다른 사랑이래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왜 하필 내 친구야?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3년?
그동안 제가 뭐였냐고 물었어요.
그 사람 말하더라고요.
“난 걔 사랑 안 해. 너랑은 다른 거야.
걘 여자 같고, 넌 엄마 같고
그리고 섹시하잖아.”
“그냥 즐긴 거야.”
“10년을 넘게 만났는데 너도 이 정도는 이해해라.”
이해하래요.
“결혼은 너랑 할 건데 왜 이래!
네가 고생했는데 나 결혼은 너랑 해준다고.”
.. 해준대요.
그래서 저 그냥 나왔어요.
그리고 그었어요.
그 사람도 친구도 죽이고 싶었는데
그냥 제가 없어지면 끝날 것 같아서
제가 죽으려고 했어요.
부모님 생각나서 못했어요.
그 남자는 계속 연락하고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기회비용 생각하면 너도 생각 잘해. 우리 결혼해야지.”
그래서 다 끊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이사했고, 일도 그만두고
번호도 바꿨어요.
근데 저 이제 사람 못 믿겠어요.
사랑도 다시는 못 할 것 같아요.
용서도 못 하고,
그냥 모든 게 다 망가진 것 같아요.
일하느라 꾸미는 것도 한 번도 못 해봤는데,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요즘은 마셔요.
술 안 마시면, 잠을 못 자요.
살도 심각하게 빠졌고 남은 건 너덜너덜한 몸이랑
상처랑 우울증이랑 불면증이에요.
여자의 손이 작게 떨립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모든 게 귀찮아요. 아무것도 하기 싫고,
먹기도 싫고.. 저. 이상한 거 아니죠?
마주님도 제가 바보 같죠?”
“그냥 …다 무서워요…
혼자 있는 것도 무섭고, 사람 만나는 것도 무섭고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할까 봐…”
“…저…이대로…망가진 채로 살게 되는 거 아닐까요?”
또각, 또각.
마차 안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한 말굽 소리만 흐르고 있습니다.
신비는 깊은 한숨을 천천히 내쉽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합니다.
잠시 침묵
“그런데 그렇게까지 사랑한 사람 요즘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시간도 삶도, 인생도 아무 계산 없이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보 같아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바보라서가 아니라,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잃은 게 아니라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동시에 무너진 겁니다.”
“그건 누구라도 버티기 어려운 일입니다.”
“많이 무서우셨죠?
혼자 있는 것도, 사람 만나는 것도, 다 무서워질 만큼 깊이 사랑하셨고, 크게 다치신 겁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잠도 못 자고,
이상한 게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보석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게 보석인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을 알아볼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잠시 침묵
“그 사람 하나, 그리고 그 친구 때문에 당신이 사랑을 못 하게 되는 건.”
“한 사람의 잘못으로 당신 인생 전체가 멈추는 건 절대 맞지 않습니다.”
신비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말합니다.
“복수는 필요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당신을 잃은 것 자체가 큰 벌입니다.”
잠시
“그리고 지금 제일 속상한 건 당신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나입니다.”
“술로 버티고, 몸에 상처를 남기고, 숨어버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일 이제 멈추세요.”
신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따뜻해집니다.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사람입니다.
자격은 이미 넘칩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늦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장 예쁩니다.”
잠시 침묵
“이별은 아프지만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보세요.”
신비는 조용히 미소 짓습니다.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지나가는 겁니다.”
“어느 날은 괜찮았다가 어느 날은 다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지나가는 과정이니까요.”
아무 말 없이 여자는 눈물을 계속 흘립니다.
신비는 그저 조용히 두고 봅니다.
한참이 지나고
여자는 숨을 고르며 작게 말합니다.
“저
내일은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그 집 돈까스부터 먹어보려구요.”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간 김에 아직 한 번도 못 해본 네일아트도,
해보고 싶어요.”
조금 어색한 웃음이 스칩니다.
“너무 울어서인지 좀 자야 할 것 같아요…”
“마주님. 나중에 혹시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말끝이 흐려집니다.
“같이 와도 될까요?”
신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날이 온다면 꼭 같이 오세요.”
잠시 미소를 짓습니다.
“그때는 오늘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잠깐 숨을 고른 뒤
조금 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의 당신을 만나는 사람이니까요.”
“이 시간을 지나 다시 살아낸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처음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조금은 따뜻해진, 조금은 살아있는 눈물이었습니다.
마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그녀는 잠에 빠졌습니다.
또각, 또각.
신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합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건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잠시 침묵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새로운 사랑에게 굳이 드러내거나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이유 없이 사랑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고요한 밤길을 천천히 달립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