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꿈마차 6
신비는 따뜻한 민트티를 한 모금 마십니다.
입안에 남은 온기가 천천히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마음항아리 앞에 섭니다.
밤은 고요하고,
마차 위로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항아리 속 보석들은 숨을 죽인 듯 가만히 빛나고 있습니다.
신비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넣습니다.
오늘 선택된 보석은 밝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연한 크림빛 위에 따뜻한 빛이 스며 있고,
그 아래에는 아주 얇게 흐린 색이 남아 있습니다.
기쁜 마음 위에 설명되지 않은 작은 낯섦이 얹힌 빛입니다. 그 보석은 설레는 날의 보석입니다.
신비는 그 보석을 연료함에 넣습니다.
마차의 등불이 부드럽게 밝혀집니다.
또각, 또각.
꿈마차는 마음정류소로 조용히 달립니다.
정류장에는 한 여자가 서 있습니다.
신비는 말합니다.
“꿈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말이든, 하셔도 됩니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을 꺼냅니다.
“저 오늘 이사했습니다. 첫 직장을 얻어 타지로 처음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집은 아빠 찬스로 보증금을 획득했습니다.”
짧게 웃습니다.
“혼자 힘으로 했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제 집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말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엄마랑 같이 이것저것 준비했거든요. 옷도 사고, 그릇도 고르고, 이게 더 예쁘지 않냐고 계속 물어보면서 그냥 너무 좋았습니다.”
잠깐 웃습니다.
“근데 엄마는 계속 저를 보시더라고요. 물가에 내놓은 애 같다고, 걱정된다고 하시면서 한숨을 계속 쉬셨습니다.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시는지.”
조금 숨을 고릅니다.
“이삿날에 아빠 차 타고 가는데도 저는 계속 웃었습니다. 진짜 좋았습니다. 집도 깨끗하고, 제 집 같고 다 좋았습니다.”
말이 조금 느려집니다.
“집에 들어가니 이미 입주청소가 되어 있는 집이었습니다. 밝고, 깔끔하고, 생각보다 훨씬 예뻤습니다. 괜히 기분이 좋아서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엄마, 여기 봐. 여기 진짜 예쁘지 않아?”
그런 저를 보며 엄마는 한숨을 쉬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정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새벽부터 만들어 오신 반찬들,
냉동으로 얼려 오신 국들, 하나씩 꺼내 차곡차곡 정리해 주셨습니다.
옷을 정리하시다가 잠시 멈추시더니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으셨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다시 옷을 접으셨고, 세탁기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붙었습니다. 사용법이었습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작은 메모들이 하나씩 붙었습니다.
이건 이렇게 쓰면 돼,
이건 꼭 확인하고 돌리고 하나씩 천천히 설명이 되어있었습니다.”
마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늦은 저녁, 엄마는 제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주셨습니다. 식탁에 앉아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자 있을 때는 뭘 조심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고기는 거의 드시지 못했습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웃으시며 고기를 구워주셨습니다. 우리 딸은 잘할 수 있다.
짧은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춥니다.
“그날 밤, 저를 집에 내려주시고 두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봤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조금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습니다.
“집에 올라와 침대에 누웠습니다. 조용했습니다. 몸을 뒤척이던 순간, 베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손을 넣어보니 두툼하게 접힌 봉투 하나가 잡혔습니다.
꺼내보니 아빠의 편지였습니다.”
그녀는 숨을 천천히 삼킵니다.
“하루 종일 웃고 계셨던 아빠. 편지를 펼쳤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의 날개를 펼쳐보렴.
아빠는 아직 살아있다. 네가 없는 집에 엄마가 슬퍼하지만 엄마는 내가 잘 챙길게.걱정 하지마.”
그리고
“아빠가 쓴 이 일기장은 네가 힘들 때 꺼내어 보길 바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옆에 놓여 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권의 노트였습니다.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빠의 글씨로 적힌 일기장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써 내려간 기록들이었습니다.
잠시 멈춰
그 노트를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500만 원.
“자리 잡기 전까진 힘들 거다.”
그 한 줄.
그 순간 참고 있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겨우 숨을 고릅니다.
“저 혼자서도 잘 살아낼 수 있겠죠.”
마차 안이 조용해집니다.
신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갑니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시작, 혼자만의 보금자리. 얼마나 설레었을까요.
예쁜 것들을 고르며 회사생활을 하고, 예쁜 집에서 예쁜 식기에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상상까지.. 그 모든 시간이 참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어렵습니다. 낯선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손님은 앞으로를 보고 있었고, 부모님은 지금까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날이었지만 전혀 다른 마음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에게는 설렘이었고, 부모님에게는 걱정이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해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걱정을 멈추지 못합니다.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혹시 힘들지는 않을까를 더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옵니다. 반찬을 더 싸주고, 메모를 붙이고,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건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계속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또 어떤 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삶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기댈 곳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해 내야 하는 시작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시작이든 가볍지 않았고, 쉽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같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받은 이 시작은, 그만큼 부모님이 힘을 실어주고 있었기에 조금은 더 단단하게, 조금은 덜 흔들리게 내딛을 수 있는 첫걸음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와 비교할 일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랑 위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아이로 보입니다.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도 지켜봐야 하는 사람으로요.
그래서 괜찮냐고 묻기보다, 괜찮지 않을까 봐 계속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마음은 걱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붙잡고 싶은 마음,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더 챙기게 되는 마음.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본 그 일기장에는 사랑하는 딸의 성장과정을 기록한 아빠의 긴 시간과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부모는 큰 순간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태어나던 그 순간,
처음으로 말을 했던 날, 첫 걸음마 하던 날,
자식이 처음 웃던 날, 처음 아프던 날,
처음 혼자 해낸 날까지 오래 붙들고 살아갑니다.
자식에게는 지나간 하루였을지 몰라도 부모에게는 다 기록해두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늘 뒤늦게 보입니다.
품 안에 있을 때는 일상처럼 느껴지고, 떨어져 나와서야 그것이 얼마나 촘촘했는지 알게 됩니다.
사랑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매일의 반찬이었고, 붙여둔 메모였고, 고기 한 점 더 올려주던 손길이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던 아빠의 편지였던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춥니다.
당신은 이미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잘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해보려고 하고있는 사람이니까요.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라 서툰 채로 계속 살아가는 일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졌다가도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을 남깁니다.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순간에도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고, 자식은 그 사랑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해는 늘 늦습니다.
하지만 늦어도 괜찮습니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부모의 사랑은 지나간 뒤에야 선명해지고, 자식의 사랑은 늦게 알아차릴수록 더 깊어집니다.
시작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중요합니다. 처음이 서툴러도 그 처음을 건너야 삶이 시작되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그 첫 페이지를 넘기셨습니다.
그러니 잘 살아내실 겁니다.
아니, 살아내게 될 겁니다.
당신은 부모님의 자부심입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춥니다.
그녀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잘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요.”
마차에서 내립니다.
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신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합니다.
사랑은 늘 곁에 있을 때는 평범하고, 멀어지고 나서야 얼마나 깊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당신의 첫걸음을 응원합니다.
또각, 또각.
고요한 어둠을 향해 조용히 달립니다.
"꿈마차는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태우고 오늘도 조용히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