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 함이라는 것

전생연분 3

by 신비

이영은 늘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앞서 나서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다만 연서가 발걸음을 옮길 때,

그 길에 위험이 보이면 먼저 살폈고,

바람이 거셀 때면 조용히 그 옆에 섰다.


오라버니.


연서가 마루에 앉아 붓을 들고 말했다.

종이 위에는 삐뚤한 글자가 몇 자 적혀 있었다.


이 글자는 왜 이렇게 쓰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해도 마음에 들지 안 사 옵니다.


이영은 가까이 다가가 연서의 손을 살폈다.

손끝에 힘이 지나치게 들 어가 있었다.


손목에 힘을 빼거라.”


그는 연서의 손을 잡지 않았다.

다만 아래에서 조용히 받쳐 주었다.

붓이 흔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붓은 쥐는 것이 아니라, 올려 두는 것이다.


연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선을 그었다.

이번에는 글자가 한결 고왔다.


아.


연서는 눈을 크게 뜨고 웃었다.


정말 그러하옵니다.


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오후,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다.

연서는 마당을 건너다 말고 멈춰 섰다.


빗줄기가 거세어, 치맛자락이 금세 젖을 듯했다.

그때 이영이 겉옷을 벗어 들었다.


이쪽으로 오너라.


연서는 잠시 망설였다.


오라버니의 옷이옵니다.


연서 네가 젖는 게 그것이 더 염려된다.


이영의 말투는 늘 그랬듯 차분했다.


대감께서 아시면, 크게 근심하실 것이다.


연서는 더 말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겉옷 아래로 들어가자, 빗소리가 한결 멀어졌다.


오라버니는 늘 이렇사옵니다.


연서가 문득 말했다.


무엇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먼저 살피시옵니다.


이영은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 그것이 내 도리다.


도리라니요?


연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영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답했다.


연서 너의 곁에 있는 사람의 도리다.


그 말은 설명이었으나, 다짐에 가까웠다.

연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연서는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늘 제 곁에 계셔야 하겠사옵니다.


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밤, 현조판서는 이영을 서재로 모셨다.


대군 마마.

현조판서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소인의 집에서 학문을 익히시며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없사옵니다.


이영은 곧바로 답했다.


대감의 가르침이 지극히 정성스러워, 오히려 제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과분하신 말씀이옵니다.


현조판서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다만… 소인의 딸이 마마의 공부에 누가 되지는 않는지,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리옵니다.


허연서 말씀이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아니옵니다.


이영은 분명하게 말했다.


연서는 방해가 되기는커녕—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존재이옵니다.


현조판서의 손이 잠시 굳었다.


…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송구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대감.

이영은 차분히 말했다.


저의 연서는 귀히 보호받아야 할 아이입니다.


제가 살피겠사옵니다.


그 말은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현조판서는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현조판서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띠었다.


마마의 뜻,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날 이후로, 현조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확신했다.


연서의 곁에는, 이 사람이 가장 어울린다.

연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아무 의심 없이 이영을 불렀을 뿐이었다.


오라버니.


그 이름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 누구도— 이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