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연분 2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요란하지는 않았으나,
처마 끝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이 마당의 흙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현조판서의 서재는 늘 그렇듯 고요했고, 문밖
의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대감.”
낮고 공손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현조판서는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서 드시옵소서.”
문이 열리자, 젊은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나이는 아직 어렸으나, 몸가짐에는 이미 궁중의 예법이 깊게 배어 있었다.
옷차림은 검소했으되 흐트러짐이 없었고, 고개를 숙이는 각도조차 단정했다.
“대군 마마를 뵙사옵니다.”
현조판서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서자 마마—비록 적통은 아니나, 왕의 피를 이은 분이었다.
“부디 과한 예는 마시옵소서, 대감.”
이영은 조용히 말하며 손짓했다.
“제가 대감께 글을 배우러 온 처지이옵니다.”
현조판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마의 학문을 맡게 된 것만으로도 이 집안의 큰 영광이옵니다.”
이영은 잠시 현조판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부터 신세를 지겠사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버님—!”
서재 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맑은 목소리와 함께 작은 그림 한 장을 들고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허연서였다. 치맛자락을 제대로 여밀 틈도 없이 뛰어 들어온 모습이었다.
“연서야.”
현조판서의 목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예를 갖추거라.”
그제야 연서는 서재 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낯선 사내, 그리고 아버지의 태도. 연서는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문안 올리옵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이영의 시선이 연서에게 닿았다. 눈이 컸다. 생각보다 또렷했고, 숨김이 없었다. 아이였다. 분명 아이였으나, 그 눈빛에는 묘하게 사람을 붙드는 힘이 있었다.
“이 아이는…?”
이영이 조용히 물었다.
현조판서는 한 걸음 물러서며 답했다.
“소인의 외동딸 허연서이옵니다.”
연서는 그제야 상대가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몸을 낮추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연서는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 뵙사옵니다.”
이영은 잠시 연서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고개를 드셔도 되옵니다.”
연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계산 없이, 있는 그대로 물었다.
“아버님, 이분은 누구시옵니까?”
“이분은 영대군 마마시다. 예를 갖추거라.”
이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영이라 하옵니다.”
연서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대군마마시옵니까?”
“그렇습니다.”
“아.”
연서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재에 오래 계시옵니까?”
그 물음에, 이영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 글을 배우는 동안은 그러할 듯하옵니다.”
“그렇다면.”
연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오라버니라 불러도 되옵니까?”
서재 안의 공기가 잠시 멈췄다.
현조판서의 눈이 커졌고,
이영은 순간 말을 잃었다.
“… 연서야.”
현조판서가 급히 입을 열었다.
“마마께 그런 호칭은—”
“괜찮사옵니다.”
이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이의 말이니, 허락하겠사옵니다.”
연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오라버니.”
그 한마디에— 이영의 가슴이 처음으로,
이유 없이 요동쳤다.
이 집에 들어온 이유가 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아이가,
앞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장 깊이 흔들
존재가 되리라는 것을.
그날 이후로, 서재의 풍경은 달라졌다.
이영이 서재에 자리를 잡은 뒤부터,
현조판서의 집은 늘 조용하면서도
묘하게 숨이 차 있었다.
글 읽는 소리와 붓 긋는 소리가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에는 어린아이의 발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연서는 서재 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불렀다.
전처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단단히 일러둔 탓이었다.
“들어가도 되옵니까?”
이영이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들라.”
연서는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다과 접시가 들려 있었다.
단이가 준비해 준 것을, 연서가 직접 들고 온 것이었다.
“아버님께서 공부 중이시니 방해하지 말라 하셨으나…”
연서는 말을 흐리며 웃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을 듯하여서요.”
이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서가 들고 온 접시를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구나.”
그 한마디가 짧았음에도,
연서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라버니는 매일 이렇게 공부만 하시옵니까?”
“그러하옵니다.”
“지루하지 않으십니까?”
이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지루함을 느낄 여유가 없사옵니다.”
그 말에, 연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하여 그러하시옵니까”
“… 그래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옵니다.”
연서는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답이 조금 쓸쓸하게 들렸을 뿐이었다. 연서는 괜히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책들은 가지런했고, 붓과 먹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영이 머무르는 자리는 지나칠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말하거라.”
“오라버니는 늘 이렇게 반듯하십니다.”
이영은 그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반듯함은, 살아남기 위한 방도일 뿐이옵니다.”
연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요.”
연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연서는 오라버니가 좋아요.”
그 말은 아무 뜻도 담지 않은 아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영에게는—그렇지 않았다.
이영은 연서를 바라보았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얼굴, 그러나 거짓 없는 눈빛.
“연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어찌하여요?”
“사람의 마음은—”
이영은 말을 멈췄다. 그 말을 끝까지 잇는 순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아니, 아니다.”
연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라버니는 연서를 좋아하시옵니까?”
그 질문에, 이영의 손이 잠시 굳었다.
낯빛이 달아오른 이영은 말했다.
“… 연서는 귀한 아이다.”
그는 그렇게 답했다.
연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연서는 다과를 내려놓고는 서재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붓을 잡고 종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영은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놀림은 자유로웠고, 규칙이 없었다.
그 자유로움이—이영에게는 눈부셨다.
그날 이후로, 연서는 자연스럽게 이영의 곁에 머물렀다.
아침이면 문안 인사를 했고, 낮에는 글을 배우다 졸린 눈을 비볐으며, 밤이 되면 “오라버니”라는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그 이름은 어느새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이영만은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자신에게는 결코 가벼운 호칭이 아니라는 것을. 오라버니.
그 네 글자가, 앞으로 자신의 삶을 얼마나 깊게 묶어 두게 될지.
이영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아이가 훗날,
자신의 전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