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실험 세 번째 시리즈
내 삶은 내게만 오래 기억된다.
어디선가 봤던 글이었다. 삶은 내게만 오래 기억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정말 내가 내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나를 오랫동안 기억해줄까. 내가 위인전에 남을 만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니니까. 결국 나는 내 자신을 가장 중요히 생각하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 나이와 시기에 따라 찾아오는 생각들을 기록하기로 시작했다.
내가 과거에서 현재로 내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어떤 생각을 제일 아끼며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어떤 습관들을 과거에 버리고 왔는지. 나를 다시 확립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기기 위해, 나는 오늘 나 자신에 대한 얘기들을 써보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가치판단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했다. 어떤 일을 겪게 되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찾아온 걸까, 그것을 겪고 내게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 가에 대해 끝없이 파고드는 성격을 가졌다. 한 해의 절반이라는 시간이 지날 동안 나는 수많은 위기에 봉착되어 철저히 가루처럼 부서졌다. 타인에 의해 삶이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난데없이 천국으로 상승하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지 못해 늘 슬픔에 잡아먹히기 일쑤였다. 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외면한 채, 자꾸 더러운 것들을 혐오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부어 그것들을 정화하는 데 장애가 온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가볍게 여기며 그와 같은 위기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성격이 참 피곤하구나 싶다. 머릿속에 혼돈이 찾아오면, 늘 그것들을 다시 처음부터 재배열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며 살아가느냐, 그게 아니면 이 모든 나의 관습을 내려놓고 걱정 없이 단순하고 편하게 사느냐. 최근 나는 이런 딜레마에 잠식됐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나의 장녀 같은 성격은 늘 스스로를 채찍 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물론 실제로도 장녀이다) 아무튼 불과 작년이었던 스물한 살에는 넘어지고 부딪히는 걸 즐겼다. 상처받고 아물면서 새살이 돋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벌어지는 모든 과정을 즐겼다. 꽤나 찬란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일 년밖에 안됐지만. 하지만 올 해는 그냥 조급하다. 조급한 마음밖에 없어서 바쁘게 살며 두려워만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문득 의심이 들고 난 후로 머릿속에는 물음만 둥둥 떠다닌다.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내 속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무게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지느냐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속 깊은 곳에 있는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게 너무나 어려워졌다. 이젠 그냥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갖고 있구나 싶다.
내가 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니 나는 서서히 나를 잊어갔고, 누군가에게 나 이런 사람이에요 하고 소개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브랜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데, 내가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가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 들 고부터였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졌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그 자리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내 특징, 내 습관 등 나를 이룬 모든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천천히 깊게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내가 나를 정의 내리기엔 나는 나로 산지 22년이나 됐기에 내가 편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던 남들이 바라보는&생각하는 나에 대한 질문받기를 즐겼던 것도 있다) 누가 나에 대해 너는 이런 사람인 것 같다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정말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 열심히 살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자부했던 내 성격은 과연 내 본성이었을까. 능력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 살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육각형이 뛰어나고 최대한 높은 레벨의 인재상을 원하는 이 사회에 맞춰져 내가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나는 정말 붙임성과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사회성이 좋다고,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그냥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 마음이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를 꽁꽁 싸매고 가려서 보여준 게 아닐까. 나의 본성이 무엇일까.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내 본질이 무엇일까. 내 중심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했다.
어제는 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착한 건지 소심한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걸 듣고 ‘에이 소 심한 건 아니지 내가 얼마나 한 성깔 하는데~’ 하며 받아쳤던 기억이 난다. 가끔 내가 그 사람한테 툭 툭 내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나는 화살을 나에게 돌리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오 나에 대한 이런 평가는 처음인데 하며 귀 기울여 들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을 불평하고 탓하기보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나의 사고방식을 얘기해줬다. 그래서 답답하고 걱정된다고 했다. 뭐 그 밖에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귀가 후에 잠을 자고, 새벽 다섯 시에 잠깐 깼다. 몸을 뒤척이다가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결국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지, 그냥 대가리 꽃밭으로 살 수는 없는지. 생각이 너무 많아 답답하고 괴로워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내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나누기가 무섭고 두려웠다. 나눌 사람은 있지만, 나의 무거운 물음이 상대까지 힘들게 할까 봐. 또는 귀찮을까 봐.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짐의 무게가 다른데 내가 하는 얘기가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차라리 그럴 바엔 그냥 나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솔직한 얘기를 떠들고 어디에 써서 올리고 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
그런데 마침 오늘 다녀온 독서모임에서 토막글 쓰기를 하는 주간이었고, 주제가 딜레마였다.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을 썼다. 오히려 내 무거운 생각을 전달하기 쉬웠다. 애초에 친분이 없었고, 서로의 나이도, 직업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 채 그저 이름만 알고 책을 토대로 대화만 했던 분들이니까. 각자 서로에 대한 기대가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각자의 글을 읽고 맨 뒤에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까지 간단하게 말했다. 어떤 분께서 나의 글을 읽고 난 후, 자신이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 작가의 <농담>에 나온 문장을 말씀해주셨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었다.)
또 다른 분께서는 이미 모임 전부터 나를 알고 계셨는데, 그때도 느꼈지만 나와 대화를 나눠보면 내가 나이에 비해 성숙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느꼈고, 그것이 결국은 나의 이런 사유하는 습관에서 출발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밖에도 다들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집에 가는 내내 계속 코멘트를 읽고 또 읽었다. 내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말씀해주실 때 경청을 하느라, 바로 받아 적지 못한 게 사실 많이 아쉽기도 하다)
결국은 정답은 없고,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잘못된 것이 없으며 그 선택을 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된다. 많은 이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크게 보면 전부 나다. 나는 하나의 가면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좋음과 아름다움 속에서 살고 있던 것이었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내가 그렇게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지만, 나는 내 얘기를 솔직하게 썼다는 것에 의의를 두겠다. 가까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두려워 솔직한 이야기를 꽁꽁 숨기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앞으로 또 내가 어떤 상황을 직면하게 될 진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그냥 기쁠 땐 기쁘고, 슬플 땐 슬프다며 내 감정을 의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