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면서
어느덧 3월이 끝나간다. 나는 늘 3월이 좋았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 개학을 하여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학생들이 내 앞을 걸어가고, 새로운 계절을 알리듯이 찾아오는 봄 공기의 냄새는 마음을 간질거리게 한다. 늘 계절이 바뀌는 이맘때의 순간을 사랑한다. 가슴속에서 수천 겹의 꽃잎을 물고 있는 열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잊어버린 나의 가슴 속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들이 느껴진다.
조금 더 확률을 계산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 진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알아가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비효율적이라고, 멍청하게 여길 지 몰라도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최우선이라고 여기며 도전해보려고 한다. 3월의 끝자락에 서서, 앞으로 다가올 4월에는 어떤 인연이, 무슨 감정이 내게 찾아올지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설레는 순간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지금 나의 모습에서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내 모습을 찾고 있다. 과거의 나는 속이 꽉 찼고,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그 모습에 비해 지금 현재의 나는 속의 것들이 빠져나간 것만 같고 너무나도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현재의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게 됐다. 정확하게 어느 지점부터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게 됐을까? 기록을 하지 않아서일까? 필사를 하지 않아서일까? 미루고 미루는 나 자신이 하찮고 바보 같기 때문일까.
스무 살부터 나는 광적으로 의미 깊은 대화를 좇으며 살아왔다. 꼭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영감을 얻고,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남는 기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에 비하여 많이 가벼워진 것 같다는 것을 느낀다. 3월엔 열일곱 개의 약속을 나갔다. 대부분은 다 술 약속 또는 목적을 위한 일회성 만남 등 작년 이맘때 내가 몸서리 끼치게 싫어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 생각 없이 행하며 의미 없는 소비를 하고, 시간을 허비한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을 낭비한다.
스물둘의 3월 끝자락에 서서,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확실히 알아가게 된다. 나는 의미 없는 일회성 만남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 '의미 없음'이라는 말은 나한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오고, 지켜왔던 나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기분이 들어서다. 작년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으나, 그 다른 세계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른 가치관으로 부딪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올 해는 만나는 사람들의 분야를 조금 더 좁히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너무 내 세계서만 놀아서 도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경각심은 갖고 가려고 한다.) 그 일회성 만남에서 시작하는 얕은 관계가 마음이 맞아 깊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이런 상태인데 누굴 더 만나봤자 포화상태만 될 뿐. 조금 더 나를 돌봐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나의 바운더리가 확실한 사람이다. 나의 선에 들어오지 않은 누군가가 나의 삶에 억지로 개입하려고 하면 극도에 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 이전까지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해도, 선을 넘는 순간 그 마음이 우수수 사라진다. 어떻게 보면 극도로 예민하고 이상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냥 나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어떤 이가 나에 대해 함부로 규정짓고 판단하며 발설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나도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함부로 행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나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요 근래에 안 좋은 습관이 생겼다. 나의 감정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타인이 내게 분명히 폐를 끼쳐 내가 불편함을 느끼기에 마땅한 상황에, 그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그 세계에서는 옳고 정상적인 사람들일 테고 그 사람을 지지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것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누군가가 잘못됐고 불편해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 정말 의미 없는 게 아닐까. 그냥 그저 안 맞았던 거고 가치판단이 달랐던 건데, 내가 함부로 타인에게 나의 잣대를 들이밀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실 나는 엄청나게 작은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 불편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것을 또 부정하는 습관. 분명 어떤 이는 여유롭게 넘길 수 있을 텐데 나는 그게 되지 않나 보다 하며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나의 고민들을 듣고, 누군가가 내게 경영학 용어 중,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알려준다.
창조적 파괴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제품이나 생산방식, 시장, 시스템 등을 파괴하는 일련의 과정 내지는 활동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결국은 네가 기존에 갖고 있던 가치관들을 파괴하는 행위가 결국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거라고. 그러니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파괴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더 화려하게 파괴하기로 했다. 조금 더 처참히 부서져서 가루같이 부드러운 사람이 되길 위해.
'그날 나는 처음으로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씩씩하게 뛰어가는 어머니의 등판을 따라 달리면 나 역시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진짜 멋진 사람은 입이 아닌 등으로 말하며, 그것을 보고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따라서 우리는 입보다 등을 더 열심히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