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명화극장

영화 버닝을 보고 싶은 이유

by 이은주

우리는 달렸다. 포도밭을 지나 오세자와 씨에게 인천의 낡은 소금창고를 보여 드리기 위해. 낡고 덜컹거리는 자동차 안에서 끝없이 펼쳐진 염장식물들의 붉은 카펫 위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나타내며 버려진 소금창고를 바라보던 중 우린 눈을 의심했다. 소금창고 곁에 옷을 훌훌 벗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커다란 개 한마리와 함께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셋은 다시 모일 기회가 없었으나 어떤 폭발물을 심장에 안고 헤어졌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고 우리 셋이 하필이면 왜 그 시각, 그 자리를 달려야 했는지에 대한 필연성 같았다. 광폭하게 쏟아지는 빗속 버스정류장에서 멍하니 서있다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버닝의 원작이 된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검색하다 얻은 이미지와 내가 경험한 헛간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점점 새로운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이것이 내가 영화 버닝을 보고 싶은 이유다. 버닝의 티저 포스터가 공개되자 빗방울이 맺힌 유리문을 금방 열고 들어올 것 같은 배우가 만들어 내는 묘한 긴장감이 영화 버닝을 보고 싶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버닝을 보면서 나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또한 사라진 여자친구의 방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주인공의 뒷모습에서 영화 샤이닝이, 베티블로 37.2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글을 쓰는 사람 종수가 되어 영화를 보면 그의 일그러진 영혼이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 살해를 계획하며 자신의 다락방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는 논리를 세워 자신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동안 자신 또한 노파처럼, 벤처럼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닝의 뜻을 검색하다가 보일러용어사전의 해석이 흥미로웠다. 버닝, 과열보다 더 고온으로 되어 750~800℃ 이상까지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버닝은 연강의 결정립의 변화가 현저하고 탄소의 일부가 완전히 변화하여 어떠한 열처리를 해도 그 성질을 회복할 수 없다.

잃을 것이 없을 것 같은 종수와 해미, 그리고 잃을 것이 많을 것 같은 벤. 이 세 젊은이가 만나서 어떤 비등점으로 끓어 올라 연소되고 난 후 더 이상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버닝을 보기 전과 버닝을 보고 난 후의 나 또한 어떠한 노력을 해도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영화 버닝의 다의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찾아 먼 아프리카까지 갔다가 오는 여자가 있다. 그런 여자를 자기 친구들과의 모임에 초대하여 이야기를 듣다 하품을 하는 청년 벤이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글쓰는 청년이 있다. 종수의 눈은 하품하는 벤을 놓치지 않는다. 공항 주차장에 주차해 둔 포르셰를 두고 종수의 낡은 트럭에 짐을 맡긴 벤의 너그러움도 종수는 놓치지 않는다. 귀국 후 첫 통화를 엄마와 나누는 벤. 그들 세 젊은이 중 유일하게 가족과 소통하는 벤. 유쾌하고 가볍게 여행에서 돌아 온 벤의 처지와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돌아온 해미. 그리고 오래간만에 소식이 온 엄마에게 500만 원을 융통해 줘야 하는 종수.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며 자신의 여행담을 소개하는 해미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고, 간절함이 들어 있으며 절박하기까지 한데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벤과 벤의 친구들을 지켜보면서 종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해미의 행방을 묻는 종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말하는 벤의 안락함이 영화를 보는내내 불편하고 징그러웠다. 그런 징그러운 남자 벤에게 호감을 갖는 해미여서,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종수 너였다고 고백할 때 살짝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왤까. 우리의 무의식은 일관성이 없고 시종 빠르게 변하는 게 당연하기에 상대방 만큼은 일관성이 있고 쉽게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노을처럼 눈물처럼 사라지고 싶다던 해미는 자기가 바라던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런 해미를 찾아 헤매는 종수. 사라진 해미의 존재나 그녀를 찾아 헤매는 종수의 존재에게 이미 흥미를 잃고 무심히 응대하는 벤. 이들은 어쩌면 작은 왕국의 주인같기도 하다. 해미와 종수는 가난한 나라에서 이웃나라로 온 이방인이기도 하고, 종교전쟁으로 나라를 잃은 난민이기도 하며 어떤 재난으로 사라져 버린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이주민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을 자신의 왕국에서 살게 해준 너그러운 벤은 그들이 마치 연기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언제든 종수와 해미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 온다면 벤은 가슴으로 베이스를 느끼라는 모호한 말을 하며 그들의 존재를 무시할 것이다. 뼈 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기 위해 벤은 불을 지른다고.

그런데 벤은 알까. 이방인인 해미는, 나라 잃은 종수는 그 말에 묘한 질투심이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슴으로 베이스를 느끼기도 전에 그들 가슴은 뼈 속까지 석화되어 있다는 것을. 아직 시작도 해보지 못한 청춘이 벤의 웃는 얼굴을 보고 따라 웃을 땐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우는 것이란 것을. 받으면 끊어지고 받으면 끊어지는 수화기 저편의 누군가에게 악을 쓰고 마침내 거칠게 내 던지고 싶은 삶이란 것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