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서 여든까지 살고 있으니까 50년, 오십 년 동안 살았지. 내가 만리동 여포로 불렸어. 기운이 장사였어.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 알지?”
“나도 외갓집에서 자랐어.”
“열세 살에 서울로 올라왔지.”
“10살에 6.25가 났으니까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어. 지금도 읽을 줄은 아는데 쓸 줄은 잘 몰라. 받침 같은 걸 틀리지.”
마을버스 할아버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씀을 계속하신다.
“정명아, 우리가 어떻게 인연이 되었지? 너는 보물이다.”
마을버스 할아버지와 정명이의 연령이 참 센스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팔십 그리고 여덟. 나는 마을버스 할아버지가 싸인까지 한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를 드렸을 때 돌려주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책읽을 시간 있으면 술이나 마시겠어. 읽지도 않을 건데 주지 마. 아깝기만 해.”
묘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책에서 만날 법한 인물이다. 『돈 까밀로 신부』 시대의 인물들 같다. 아무리 책을 안 읽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선물로 드리면 받는데 다른 사람이나 읽으라고 주라며 면전에서 거절하셨던 그다.
마을버스 할아버지는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신다. 여든 살에 새벽 3시쯤 일어나셔서 마을버스를 낮 1시 30분 운행한 다음 퇴근 길 점심식사에 곁들이는 반주치고는 역시 과하다 두 병째다. 과연 여포 할아버지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그래서 당신은 제가 싸인까지 한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를 돌려주셨군요. 읽지 않을 텐데 주지 말라고, 아깝기만 하다고.
“내가 외가에서 살았다고 했지? 난 형제가 없어. 내가 5살에 이혼을 했거든. 그 시절 아버지는 금융조합에서 일했지.”
“외삼촌과 함께 고향에서 야반도주를 했어. 왜냐구? 외삼촌이 내 아버지나 다름없으니까. 삼촌은 고향에 노름빚을 지고 서울로 도망을 나왔어. 난 17살에 자동차 정비를 배웠고. 그때는 기계식이었는데 군대에 가서 운전병으로 뽑혔어. 운전병으로 뽑히면서 ‘밥이나 실컷 먹다 죽었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했어.”
할아버지의 점심식사가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대충 사시는 것 같아도 대충 사시지 않는 분에게서 나는 아우라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고 몸을 잘 관리해 온 느낌이랄까. 그의 투박한 언행 속에서도 나는 몸짓언어를 읽을 수 있었다. 주무실 시간이다. 이제 댁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 것이다. 노인에게 12시간의 외부 활동은 과로에 해당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에 내가 보내드린 당신이 즐겨드신다던 200g 개별 포장의 , 꼭 200g이어야 한다. 500g도 안 된다. 오리고기에 대한 감사 전화를 했는데 새로 바꾼 휴대폰이라 전화걸기가 힘이 든다고, 손녀딸에게 여러 번 배웠어도 힘이 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슬슬 일어나시려나 싶어 눈치를 살핀다. 평소에 유투브를 엄격히 관리하지만, 오늘만큼은 허락받은 정명이가 버라이어티하게 시청하고 있다. 일어서려는 듯하다가 다시 앉으신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내 이야기를 빠뜨렸다는 듯 말씀하시는데 묘사가 섬세하다.
“나중에 우리 집사람을 볼 기회가 있을 거야. 젊었을 때는 윤정희 뺨치게 예뻤어. 지금도 칠십이 넘었는데도 예뻐, 우리 사위도 예뻐, 손자도 얼마나 예쁜데.”
“인연이라는 건 참 묘한 거야. 집사람을 어떻게 만났는지 알아? 내가 차에 수박을 싣고 가다가 같은 동네 살았으니까... 그랬지. 수박 한 덩어리 드릴까요? 그리고는 한강 쳐다보고 데이트도 하고 남산도 올라가고. 그땐 통금이 있을 때야.”
“내가 열세 번 이사한 이야기했나?”
“사과 궤짝 하나, 이불 하나 메고 이사를 다녔는데 그때 생각하면서 집사람이 그래. 아이들 생각해서 도망가려다가 참았다고...”
이야기하는 방식, 내용, 진실성, 재미를 모두 갖춘 마을버스 할아버지의 팬이 된 내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인다. 꼭 만나 뵈러 가야지 하고.
“인연이라는 건 참.. 정명아 너 하고도 인연이 되었으니 우리 잘 지내보자.”
(비내리는 날 어디 가냐고 해서? 은행에 간다고 하니까 아이 맡겨놓으라고 하고, 정명이를 마을버스 운전석 옆에 태우고 마을을 빙글빙글 도시는 동안 나는 은행 볼일을 보고 다시 아이를 찾아돌아왔더랬다. 반전은 그 할아버지인 줄 알고 오전반 파트너 할아버지께 박카스를 드렸다. 아이와 나는 운전석에 계신 할아버지 두 분을 동일 인물로 알고 여름내내 버스를 탔고 오늘날 정명이 친구가 된 마을버스 할아버지는 비오는 날 아이를 맡아준 분의 오전 파트너 할아버지. 언젠가 마을버스 할아버지 두 분과 함께 계신 걸 보고 정명이와 나는 버스 안에서 소란을 떨며 놀라워했다. 도라에몽처럼 똑같은 할아버지 때문에..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인형의집언니가 덤앤더머(정명이와 나)와 함께 작은 마을버스로 마을 투어를 하다 보고는 어이없어 했더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