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는 부르주아나 타는 거지요

by 이은주


대학 3학년부터 전공과목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교양과목을 이수하기 위한 1,2학년은 기대에 못미쳤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도쿄 도내(1,2학년은 한 시간이나 떨어진 교외 도코로자와에 위치하고 있었다)로 통학이 가능해져서 진짜 마음껏 전공과목을 신청했다. 유학생에게는 일부 장학금이 지원되지만 학비가 1년에 1500만 원이나 하는 예술학교에 지원한 나를 미친짓이라고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등록금은 마련해주겠다는 엄마의 말을 중간에 틀었어야 했다고 지금의 내가 아무리 외쳐도 그 시절의 나에게는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런데 꼭 돈으로 꿈을 살 수는 없지 않을까. 다니다가 못다니면 말지, 그래도 배우고 싶은 건 배울거야. 그런 오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엄마의 가게가 빚보증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이노우에 선생님과 제자들이 서울을 방문해줘서 다행이다. 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청춘의 가장 소중한 때를 도쿄에서 보냈는데 그 순간을 함께 기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처럼 쓸쓸한 일이 있을까.
여름방학이면 야키니쿠 레스토랑에서 야간 10시간을 고기굽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나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리고 졸업을 하면 무너진 가계를 바로 세울 책임이 있으니까. 쌓이는 하얀접시들을 나르고 요리들을 나르며 집으로 돌아갈 날짜를 헤아리는 나에게 이노우에 선생님과 프리스쿨의 학생들과의 만남은 그런 나를 기억해주고 응원해주는 존재였다.

서울여행에서 돌아 온 뒤 어느날 이노우에 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나는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스키는 부르주아나 하는 거잖아요.'
그때 이노우에 선생님은 반박하지 않으셨다. 그냥 그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w군으로부터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 이노우에 선생님은 매년 겨울 가족여행을 가는데 이상도 초대했다고, 산장에서는 스키를 탈 수 있는데 스키도구 대여료만 지불하면 그외에 숙박이나 교통비는 선생님쪽에서 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노우에 선생님은 내 복잡한 감정선을 잊지 않고 계셨고 나는 내 좁은 시야를 깰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는 하얀 눈밭을 달리고 싶었다. 짐승들이 뛰어다닌 흔적을 리프트에서 감상하고 싶었다.

도쿄에 있어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받고 있는 서울에서의 어두운 뉴스들.
'마침내 그 아이가 죽는데 성공했어'(말할 수 없이 우울한 친구의 자살 소식)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구나'
'엄마, 이 상황에 누가 누굴 빌려줘요?'
'내가 안 빌려줘서 망하면 어떻게 하니?'

이런 소용돌이에서 스키계획은 10시간의 야근 아르바이트를 그나마 낭만적인 것으로 견디게 했다.

이노우에 선생님의 가족여행은 함께하지 않았으면 배우지 못했을 근검절약의 메뉴얼이었다.
부인은 아이들 간식으로 100엔샵에서 과자를 준비해왔고 스키를 타러 가는 날은 숙박한 여관에서 된장국과 간단한 반찬으로 아침이 준비되어 나왔는데 남은 밥으로는 잔멸치를 넣은 주먹밥을 준비해가셨다.
우리는 산장 한쪽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에 차가운 주먹밥을 데워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아이 둘이 있는 4인 가족의 가장인 이노우에 선생님이 이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또한 남편의 동반자로서 프리스쿨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고 응원하고 있는 부인에게도 우정과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의 삶을 통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여주기. 앞에 있는 젊은이가 비록 좁고 편협되더라도 시간을 갖고 그 문제의 실타래를 함께 풀어봐주기. 내일 당장 방세가 밀려서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타박타박 자신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노우에 선생님의 가족들은 즐겁고 떠들썩하게 주먹밥을 먹으며 가르쳐주었다. 일본의 이름모를 산장에서 주먹밥을 먹던 나는 목이 메였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
설국의 나라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곳도 삶을 견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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