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엄마 가게가 망했다. 연쇄 부도였다. 엄마의 도산 후유증은 귀국 후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내 몫의 빚과 직장으로 날아든 건강보험료 체납 독촉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죽도록 일만 하다 가겠네'는 청춘의 모토같았다.학기 중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해야만 했었다. 쇼크로 늘어진 엄마를 대신해서 정리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도 넘기고 가게도 원금을 다 갚지 못한 거래처 젊은이에게 넘기면서 빌딩 주인을 설득해서 재계약서에 어떻게든 싸인을 받아야 했다.
나는 한번 입으면 사계절 벗지 않았던 청바지를 입은 채 흐느끼며 사정했다. 열심히 살려는 거래처 사장은 묵묵히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엄마 가게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엄마의 당좌, 가계수표 잘못도 아니었다. 사회적인 경제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물리면서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격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서울역에 신이 내린지 한달밖에 안 되었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들어서자 줄줄 읊었다.
'집안 대대로 글문장으로 밥을 먹고 살았네.'(흠)
'아이만 봐도 좋다, 좋다 다 좋다 하겠어. 아이도 하나 있는 걸.'(결혼 안 할 건데?)
'마지막 등록금은 이모가 대주겠는데'(빈에 있는 이모에게는 절대로 안 알릴거야)
무당은 말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나?'
'그냥 뭐,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지 모르겠어요. 10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졸면서 학교에 가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도 졸업을 하고 오는 게 좋을거야. 졸면서라도 졸업을 하고 오게.'
나는 일어났다. 계속 학교에 다니든 서울로 돌아오든 도코행 비행기를 타야겠기에.
이노우에 선생님은 이런 사정을 듣고 쿨하게 말씀하셨다.
일본도 버블 경제가 시작되고 과도한 성장 과정에 이런 도산을 경험했다. 생각해보니 이노우에 선생님은 서울에서 멀쩡한 다리가 무너져서 버스가 추락한 뉴스를 아사히 신문이 1면에 대서특필할 때도 '일본도 한때 그랬어'하고 나를 위로해주고는 했다. 상심에 젖은 내게 이노우에 선생님은 10km 하프 코스 서류를 대신 지원해주시며 격려해주셨다.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적당할지 모르지만 나는 'やれやれ'하며 따라나섰다.
그날은 달리는데 코앞에 눈발이 떨어졌고 나는 이노우에 선생님께는 지난 밤 풀타임 홀써빙을 아르바이트 교체해 줄 사람이 없어서 일하다 왔다는 말을 못했다. 언덕을 달리면서 떨어지는 눈발을 맞으며 한사람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