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선생님이 서울에서 장기 투숙하던 호텔 로비에서 10시에 약속을 했다고 하면 나는 9시부터 로비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엔가는 9시에 전화가 왔다. "이상 미안하지만 오늘 조금 일찍 와주겠나." "이미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고 기다리고 있어요."
선생님과 함께 한국을 찾았던 제자들은 한차례 서울 구경을 하고 떠난 뒤였다. 나는 시미즈 선생님의 신간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를 선물로 받고 밤새 기획서를 써온 터였다. 선생님의 책은 이미 국내에서 소개되어 있었다. 선생님과는 전혀 연이 없는 출판사와 번역가의 손에 의해 출판된 <그림동화 X파일>은 1999년에 나와서 잔혹 동화 붐을 타고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서울 방문 전에 출판사 사장님과의 만남을 나에게 맡겼다.
그때까지 나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간 출판사에서는 팩스로 오는 전단지 같은 원고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도 하고 모델의 뷰티 노하우 대필 작가가 쓴 원고에 추가 원고를 쓰기 위해 네일클리닉에 다녀오느라 늦은 모델의 리무진에서 무작정 대기하다 두어 가지 인터뷰를 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모델들이 워킹 연습을 하는 동안 회의실에서 받아적은 미용 노하우가 책이 되었다. 모델들이 서점 사인회를 무사히 마치도록 독자들의 줄이 엉키지 않게 뛰어다니던 나는 이런 일을 하고자 다리가 뻗뻗해지도록 아르바이트를 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미야모토 테루의 문고판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미야모토 테루 문학의 독자층이 확고하지만, 그때는 KAL기 폭파범으로 알려진 김현희에 의해 몇 권이 번역되어 있었다. 역자후기에는 번역을 하는 동안 자신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 사장실은 편집실의 두 배나 넓었던 부조리한 그곳. 편집업무를 영업과 마케팅 보다 절대 우대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 사회 첫 발을 들여놓은 나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했다. 그곳은 내가 배웠던, 내가 알았던 출판사가 아니었다. 졸업 후 엄마와 단둘이 생활을 하며 매달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나는 미야모토 테루의 <별들의 슬픔>을 번역하며 테루와 함께 빚쟁이들을 피해다녔고, 테루와 함께 인생의 흔들다리를 위태위태 건너고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가있던 나와 시미즈 선생님은 출판사 사장님과 만났다. 사실 나의 일본어 회화는 외국인이 경상도 사람에게 한국어를 배우면 사투리가 섞이듯이 우체국아줌마의 아이들인 안과 나나에게 습득해서 쉽다. 간단하다. 유창하다고 볼 수 없다. 가끔 조사도 틀린다. 출판사 사장님과 시미즈 선생님과의 통역을 하면서 대화가 기존에 간행된 책에서 신간으로 화제가 이동하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밤에 번역해간 신간 목차와 본문 일부가 든 기획서를 낡은 가죽가방에서 꺼내 신간 옆에 두었다.
사장님이 기획서를 읽으며 흥미를 보였다. 일본 문화 개방이 있고 일본 영화, 일본 에니메이션이 속속 개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원제를 <미야자키 하야오를 읽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로 바꾸어 기획서를 써갔다.
힘들때면 나는 시미즈선생님과 출판사 사장님이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던 순간을 시뮬레이션할 때가 있다. 모델의 뷰티 노하우 말고, 천재인 듯 천재 아닌 쪽 원고 말고, 책을 받으면 마음이 움직여서 읽고 싶고, 국내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 그런 책을 나는 만들고 싶다. 번역하고 싶다. 쓰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해야 했다.
여기서 하나 더. 마지막 우정을 소개할까 한다. 시미즈 선생님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 책을 출판해 왔기에 계약서에 서명을 끝내자 천천히 아주 정중한 표정이 되어서 제안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가 출판되면 저자 증정본 이외에도 문예학과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한국 유학생에게도 주고 싶으니까 배편으로 책을 보내줄 수 있겠는가고. 그리고 선금을 지불하고 가겠다고.. 나는 기억한다. 출판사 사장님 눈빛을. 선생님과 내가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보냈던 우정어린 몸짓언어를. 골목을 빠져나오며 시미즈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이상, 언제 그렇게 일본어를 잘 하게 되었어?"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