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명화극장

베니스에서의 죽음

by 이은주



설 명절 특선으로 달콤한 인생을 보았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소문만 무성하게 듣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았다.
어떤 이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소감을 써둔 것을 보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플라톤의 향연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웠다. 크산티페에겐 안된 일이지만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관에는 아내가 집사 또는 대리모, 시쳇말로 하자면 재산정도로 생각됐으니 말이다. (현재에 비춰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할까? 그렇지 않을까?) 대신 육체적 사랑을 전제한 미소년이 정신적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오늘의 queer가 어제의 normal이었으니...'

이 영화를 사랑에 대한 영화로 보거나, 죽음에 대한 영화로 보거나, 탐미주의적이고 심미적인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베스니에서의 죽음을 본 내 소감은... 영화 달콤한 인생의 엔딩 메시지로 대신할까 한다.
2008/04/19 작성//



2006/09/27 *
그 책은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팠던 날 만나게 되었다. 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울 음식이 필요했다. 냉장고에는 달걀이 며칠째 떨어져 있었고, 우유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신발을 신고 편의점을 찾았다.
아르바이트 점원이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무심코 잡지 코너에 있는 노란 표지의 책을 집어들었다. 편의점에서 팔기에는 의외인 쥐스킨트의 책이었다. '사랑을 생각하다' 책 뒷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75세 생일을 축하하며 호텔에 머무르던 독일의 대 문호 토마스 만은 자신의 컵에 물을 따르는 종업원의 모습에 반해 버리고 만다. 갈색 고수머리 청년에 대한 그의 감정은 <점점 깊어지고 강해져서 나의 인생과 사랑 모두에서 슬픔을 느꼈고>, 결국 <그 연모의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을 '향수'와 '좀머 씨 이야기'의 작가 쥐스킨트가 이야기한다. 천진스럽고도 노골적이며 흥미로운 이 <사랑과 죽음에 대한 단상>은 그의 말대로 사랑을 다른 배설물들과 확실히 구별하기 위함이며,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사랑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이다.

책 첫페이지를 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한 문구가 나온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발언이지만 작가는 사랑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적고 있다. 책표지에 쓰인 문구를 읽고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숙제를 발견한 듯이 과장되게 뇌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동경심, 신비함, 또는 반대되는 거부감 내지는 편견이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내 심장을 조여들게 했다.
나는 딱 한번 사랑을 고백한 일이 있다.
그 전까지는 흠모하기만 하고 한번도 상대방에게 알린 적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사랑했던 대상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때 가능했던 고백이었다. 만약 확신이 없었다면 언제나처럼 흠모하기만 했을 게 뻔하다. 어째서인지 나는 흠모하는 일이야말로 사랑에 가까운 것 같았다. 고백을 하고 거절을 당하거나 사귄다는 일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로는 타인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상대방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으며 망성였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거절을 해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누군가를 흠모할 때면 마침내 그들의 심정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그 심정을 알아도 결과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책표지에 반하여 산 쥐스킨트의 '사랑을 생각하다'. 이 책에는 노작가의 일기가 소개되어 있다. '한 인간에 매혹당해 그를 얻으려고, 또 그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다시 한 번 내 인생에 일어났다. 이런 일은 스물다섯 살 이후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쥐스킨트는 말한다. 남자 종업원에 대한 노작가의 사랑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그 사랑이 동성애적인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이유는 작가의 완전한 일방성, 그리고 의식적인 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포기한다는 것은 곧 사랑의 정반대 행위이며 사랑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포기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랑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을 위해 작가는 너무나 빨리, 그리고 의도적으로 사랑을 도구화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것이 자기애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승화로 이어지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 온 일생일대의 에로스를 단지 자신의 다른 열정에 날개를 달아 주기 위해서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긴다. 이 의혹에 대해서는 비록 노작가가 우리에게 에로스를 테마로 한 독일 작품들 중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의 작가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마법사가 토끼 잡는 법을 가장 아름답게 연출할 수 있다고 해도 토끼 잡는 법을 마법사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노작가와 종업원의 이야기로부터 사랑의 본질을 가장 잘 배우는 것은 아니다.(p37 인용)

사랑은 상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나는 감사하게도 단 한 번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 사실을 오늘 '사랑을 생각하다'가 자각하게 한다. 내 안에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이 존재했었다는 자각은 낮시간이 짧아지고 있고, 곧 명절이 올 것이라는 부담감에서 조금 자유로운 기분을 맛보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도 노작가처럼 인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이런 병에 걸린다면 내가 또 다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고 생각해본다. 그것이 혹 상대적이지 않고 일방적일지라도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고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본다.

'사랑을 생각하다'는 내 평범한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영향은 단순하게도 나를 미장원에 가게 해서 파마를 하게 만들었으니... 마음속으로부터 노작가의 일기를 중얼거리며 말이다.
'한 인간에 매혹당해 그를 얻으려고, 또 그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다시 한 번 내 인생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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