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2시간 30분 후엔 나를 우석대 앞에 내려줄 것이다. 정류장에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친구와 함께 진까에 들려 소바를 먹고 전동성당 내부를 둘러본 후 한옥마을의 골동품 가게나 공예품 전시관을 어슬렁 거릴 것이다.
운전석 오른편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2011년 6월에 사서 읽기를 여러 번 중단했던 '인간과 상징' 읽기를 끝내야 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마침 496쪽 중에서 386쪽을 읽고 있으니, 이삼 일 안에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차 안에 흔들리면서 밑줄을 친다.
나는, 어느 시대에서든 예술가는 그가 속한 시대정신의 표현 수단이며 대변자라고 하는 심리학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술가의 작품이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술가는 시대의 특성이나 가치를 유형화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으로 시대의 특성이나 가치가 예술가를 만들기도 한다.(p385)
사람이 어떤 사물에 매혹되는 것은 무의식이 움직일 때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현대 예술이 야기하는 효과는 눈에 보이는 형태만으로는 충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고전적>인, 혹은 <감각적>인 예술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현대 예술은 분명히 새롭고 위화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p387)
밑줄을 긋다가 책 여백에 메모를 한다.
나의 어머니는 예술가였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균열을 작은 단추나 조각 천에서 찾아내고는 했다. 마치 그것들을 한데 모으고 조합하면 자신의 내부도 조금은 일관성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온갖 잡동사니들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내적 평화를 추구했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메모를 하자 얼마 전에 본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가 연상되었다.
그의 영화에는 마음을 혼란케하는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의 영화를 찾아 보는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395쪽에서 이런 의문에 답하듯 발견한 선험적인 문장.
대상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은 많은 예술가들이 공유한 바 있지만,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는 아주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생각을 표현해 냈다. 그는 기질부터가 신비스러운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좇아다니면서도 끝내 자기가 구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한 비극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1908년에 그린 '자화상'에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대체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썼다.
그렇다. 나는 김기덕의 영화에서 불가사의한 것, 꿈속에서처럼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고 선악이나 미추의 경계가 사라진 무의식을 본다. 무시무시해서 빨리 깨어나려고 애써도 좀처럼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본다. 마침내 의식을 찾고는 단편적인 꿈해석을 통해 더 큰 혼란에 빠진다.
'뫼비우스'가 그랬다.
영화를 보는 동안 마치 누군가의 꿈속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화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제목에서처럼 비현실적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키르케가 자기에게 정욕을 품은 남자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면 '뫼비우스'에 나오는 주인공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을 돼지로, 짐승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남편과 아들을 돼지로 만들려다 자신이 짐승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안팎의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들은 셋이서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다. 보는 이의 의식을 점점 무의식의 세계로 이끄는 마법같은 힘.
꿈은 대체로 꿈꾼 사람의 의식적인 태도를 보상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인간과 상징' p443)
영화 '뫼비우스'는 꿈처럼 무의식처럼 신화적 세계처럼 주술처럼 우리를 혼란케하는 데가 있다.
마치 억압되고 잠재된 우리들의 욕망을 한올 한올 풀어내려는 것처럼 경계가 모호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무엇과 무엇이 죄이며, 어떤 것은 가능하고 또 어떤 것은 불가능한 지, 그 속에 과연 구원이나 용서는 있는지 없는지.밤이 가면 아침은 오는지.
무의식은 의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야 자체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고 무의식 자체만의 공소함(공허의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무의식이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활동을 방치해 두면 지나치게 강력해진 나머지 파괴적인 측면만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것에 유념하고 초현실주의자가 그린 그림(가령 살바도르 달리의 '불타는 기린' 같은 그림)을 보면, 풍부한 공상성과 무의식적인 심상이 지니는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그림에서 무의식적인 심상이 지니는 압도적인 힘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공포와 그 상징성의 표현을 동시에 경험한다. 결국 무의식은 자연이기 때문에 자신의 긍정적인 자질을, 자연이 그러하듯, 넉넉하게 분출한다. 그러나 방치된 무의식, 인간 의식과의 상호 작용이 없는 무의식은, (역시나 자연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긍정적 자질을 파괴함으로써 조만간 절멸의 위기에 몰린다.(p401)
김기덕 영화는 불온하고 파괴적이며 무시무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영화를 찾아서 본다. 나의 내부 어디에선가 균형을 원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타협하고, 이해되지는 않지만 묵인하며, 도스또예프스끼처럼 '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모순. 신을 의심하는 신앙, 신에게 반항하는 신앙도 신앙에 포함된다고 했던 시미즈 선생님의 글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 나는 추함 속에서 극도로 파괴적인 세계 속에서 아주 미세한 아름다움, 작은 빛을 찾기 위해 어둠과 대면하는 것이다. 모든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열어 놓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인사동 골목 어디쯤엔가 있을 듯한 골동품 가게. 때는 심야. 불상을 향해 손전등을 밝히고 소년은 부처님께 절을 드리고 빙긋 웃는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소름이 돋기도 하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무념의 미소 같기도 한 이 웃음 또한 경계가 애매하다.
김기덕 영화는 마음을 혼란케하는 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