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아트하우스 모모에 들려 피에타를 보고 왔다.
허공에 갈고리 하나. 푸른빛 화면, 이윽고 암전.
관객에게 영화를 볼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 것 같다.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들이 고공질주를 눈앞에 두고 천천히 올라갈 때의 심정이라고 할까. 피에타는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첫 장면처럼 안구를 면도날로 도려내는 충격과 폭력성을 예감하게 했다.
추하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거기 있었다. 철거를 앞둔 청계천 상가의 노동자들. 여기도 쇼핑몰, 저기도 쇼핑몰, 쇼핑몰, 커피를 파는 카페로 도시가 화려한 변모를 계속할 때 도시의 주인공이어야 할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삶터를 잃고 변두리로 흩어져야만 하는 세상. 그런 불편한 진실을 보는 것이 아파서 외면하고자 할 때 영화 피에타는 똑바로 보라고 강요한다.
주인공 '강도'의 어머니라 자처하는 여인이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사랑, 명예, 권력, 복수, 질투, 죽음'이라 했듯이 오늘 하루도 가족을 위해 돈벌이를 나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각자의 사랑, 명예, 권력을 지키기 위해 '강도'처럼 타인을 학대하고 위협하고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는지를 묻는 듯했다. 물론 이런 강한 메시지를 도출하기까지 '피에타'를 끝까지 보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따랐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이런 글이 나온다.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은 그 유혹이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惡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강도'의 폭력성에서 어린이의 무지를 보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불감증에 걸리기까지 그는 외로웠을 테고, 아팠을 테고, 무지 배가 고팠을 테지. 그리고 누구하나 '강도'의 존재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나아 준 엄마조차도.
돈을 받기 위해 거짓 보험증서를 쓰게 하고 불구자를 만들어 버린 부부의 트럭 밑에 갈고리로 자신을 연결한 '강도'의 육체가 새벽 고속도로 위에 피빛 일직선을 그리며 멀어져 갈 때 나는 '강도'가 엄마라고 믿게끔 만들고 '강도'를 길들인 후에 '가족이 네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똑똑이 보라며' 그의 눈앞에서 자살한 여인을 생각한다. 그 여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인 또한 '강도'처럼 일그러진 영혼을 가진 괴물일 뿐이다. 그렇다. 나는 오늘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그 괴물은 어쩌면 내 안에서도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실패하거나 좌절하면 나의 내면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어쩌면 내안에는 자의식 과잉의 내가 항상 괴로운 전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라던데 나는 영화에서 자비를 엿보기 보다는 여러 가지 문제와 대면하고야 만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을 죽여도 살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라스꼴리니꼬프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생각인지 깨닫기까지 나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나는 오랫동안 라스꼴리니꼬프 흉내를 내며 이 사람은 살아도 되고, 이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이상하리만치 과다한 성범죄 뉴스를 접하면서, 성범죄를 하나의 정치적인 이슈로 몰아가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불심검문이라는 시대적 퇴행을 용서하게 하고, 사형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감정적인 차원에서 풀어가게끔 민심을 뒤흔드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함은 영화가 가진 힘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김기덕 감독은 악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다. 악을 잘 아는 사람만이 '악'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은 강도의 엄마라 자처한 여인처럼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어 세상을 좌지우지 하며 그것이 곧 진리가 되어 우리들을 위협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