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보고 하루가 지났다. 2년 동안 사귀던 세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지우는 밤거리의 나무를 발로 차고, 또 걷어찬다. 나무가 뭐라고 했나 나무를 발로 마구 걷어찬다. 지우의 마음이 걷어차이고 있는 나무 같다. 흔들리고 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바람이 불거나 누가 걷어차면 흔들리는 지우 나무. 지우의 방에는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보았던 조각 여인의 두상이 있다. 지우의 사무실 모니터에는 '빈집'에서 사라지는 연습을 하는 남자 주인공이, 또 한쪽의 모니터에서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함께 체중계에 올라가 있는 발이 클로즈업된 화면이 깜박인다. 세희는 모습을 감추기 전 이렇게 말한다. 지우가 찻집 아가씨에게 정신없이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을 목격한 다음에 한 말이다. "2년 동안 키우던 강아지도 귀찮다고 남 줬잖아." 그런 세희의 공격에 지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하고 개하고 똑같냐" 그러나 세희는 지우의 말에 납득을 한 것 같지 않다. 세희가 잡지에서 서로 다른 눈, 코, 입을 조각조각 오려서 가지고 가자 성형외과의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는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해요." 세희는 고집스럽게 말한다. "다르게 해주세요. 새롭게." 성형수술 후 새희가 된 세희는 그들만이 자주 다니던 찻집에 취직을 한다. 지우는 그런 새희가 예전의 애인 세희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새희가 지우와 하나가 된 어느날, 사라졌던 연인 세희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하얀 종이 위에 사.랑. 해라는 글씨를 붉은 글씨로 겹쳐 쓰고, 또 써서 마침내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보게 된 둥근 원형의 낙서 곁에 세희라고 서명한 편지다. 그 붉은 원형은 마치 사랑의 생태계를 그린 듯이 보인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마침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해지고 마는 질투와 욕망과 상실이 뒤섞인 애증을 새희가 된 세희의 편지는 붉은 얼룩의 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우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새희는 성형하기 전의 사진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세희가 되어 나타난다.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지우. "이게 무슨 미친짓이야."라며 광분하는 지우. 그런 지우의 반응에 혼동스러워하는 새희는 지우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나무를 걷어찬다. 발로 걷어차고 주먹질을 한다. 나무가 뭐라고 했나. 자꾸 자꾸 나무만 걷어찬다. 새로운 얼굴로 변한 새희가 지우와 잠을 잔 후 묻는다. "어땠어요?" "새로웠어요. 이런 느낌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관객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예전의 세희와 지금의 새희는 동일 인물인데 말이다. 얼굴만 바뀌면 손이나 발, 엉덩이의 주인이 같은데도 새롭다는 말인가. 바보 같다. 엉터리. 사랑한다며 애인의 손이며, 발의 감촉을 잊었다는 말인가. 영화의 이야기는 계속 주인공의 복잡한 갈등을 풀어내고 있는데 내 머릿속은 한 씬에서 멈추어버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버린다. 마침내 지우 또한 '새로운 삶을 원하십니까'라는 광고를 하고 있는 성형외과 문을 밀고 들어간다. 이제 6개월 후면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예전에 세희가 그랬듯이 오직 한 연인 때문에 성형을 했을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원하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세희와 새희로부터 멀리 떨어지길 바란 것일까? 수많은 질문을 하고 있는 동안 영화 '시간'은 끝이났다. 극장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는 월요일 밤이었는데 극장문을 나오자 화요일 새벽이 되어 있었다. 영화 '시간'은 이렇게 해서 월요일과 화요일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를 숨긴 채 끝이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서성인다.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무와 바람과 비와 구름에게 시간의 개념은 어떠한가. 자연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순환구조가 있다. 나무의 잎이 피고 지는 동안 열매를 얻을 수 있고, 다시 세월이 흘러 그 자리에 새싹이 돋는 순환. 자연세계에 속한 인간만이 오직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 인간의 생명은 시작과 끝이 확실하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도 성장기가 있고 노년기가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했던 기억을 재생하며 사랑을 유지시킨다. 사라져버리는 것. 지나가버리는 것. 마침내 끝이 날것이라는 진실 앞에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무엇인가 무한한 것에 의지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라는 무형의 것은 영원이라는 속박을 앞세워 우리를 소모하게 한다. 세희는 잠자리를 갖기 전에 지우에게 말한다. "똑같은 얼굴이라 지겹지?" 시쿤둥하게 지우가 대답한다. "아니"라고. 그런 지우에게 집요하게 비슷한 질문을 하던 세희는 자신의 얼굴을 이불로 둘둘 말고 감춰버린다. 시간이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 같은 건 아무리 찾아도 없다. 세희의 감춰진 얼굴은 분명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고통으로 가슴이 조여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 '시간'을 보는 동안 꽤 지루했다. 세희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그런 세희를 보며 미친짓이라고 화내는 지우의 마음도 알 것 같았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었다. '시간'의 개념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런 새로울 것 없는 연애싸움, 병적인 욕망은 지루하다.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1에서 12까지 둥근원 속에 갖혀 있다. 시간의 개념이 일직선일 때 세희는 2년 동안 사귄 자신에게 애정이 식어버린 지우 때문에 병들어 간다. 그런 세희를 상대하는 지우도 애정이 시들어간다. 시간의 개념이 둥근원일 때 세희는 “그대의 어디를 움켜쥐어 잠시 멈추어 있게 할 수 있을까”라는 영화 카피와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무엇이든 돌고 도는 순환의 이미지로 느낀다면 세희가 새희가 되고 싶은 마음의 방향이 오직 지우만을 위한 시도인 것도 아니며, 그런 세희를 미친짓이라고 화를 내는 지우의 고통도 마침내 시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희에 의해서 치유되어져야 할 것이다.
영화 '시간'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은 단지 연인들의 애증을 그린 서스펜스 멜로에 지나지 않는다. 웹진 무비스트의 제작노트에는 이런 설명이 소개되어 있다. 영화 '시간'은 설렘이 사라져가는 사랑에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에게 동시에 슬픈 탄식을 던지고 있다 라고. 변화무쌍한 시간 앞에서 인간은 언제까지나 이런 슬픈 탄식만 가져야 하는가. 세희는 언제까지나 변하는 지우의 마음을 좇을 것인가. 변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도 인지하지 못하던 지우는 언제까지나 자신을 모른 채 살아도 좋은가, 고 나는 묻고 싶다.
시계에 갖힌 시간을 조금 풀어놓으면 어떨까. 강박에 가까운 시간 개념과 인간은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런 개념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를 테면 무한 감정시대로 들어가면 인간은 '시간'을 잊고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진화된 인간에게 시간과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개념이 그대로 유통되기는 할 건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자니 마치 내가 세희였다가 새희가 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