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명화극장

김기덕의 활

by 이은주


2006년 3월 28일 작성.

흘러 흘러 가는 배 안에서 결혼도 하고, 해금도 켜고, 활 점도 본다는 이야기였다.
고립된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배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미야모토 테루의 '진흙의 강', 아베 코보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서 곤충 채집을 나갔다가 모래 구덩이에 빠진 주인공이 애써 탈출을 했다가 다시 자신이 빠졌던 모래 구덩이 속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의 '모래의 여자'를 생각나게 했다.

하늘을 향해 활을 당기는 할아버지.
먼 창공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활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인생을 풍자하는 듯이 보인다.
마침내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버리는 활의 모습은 마치 허무한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활(The Bow)이란 화살도 될 수 있고, 해금을 켜는 활로도 읽히듯이 소녀와의 결혼을 위해 17살만 되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배 밖의 세상에서 온 청년과의 만남을 계기로 할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하게 되는 소녀의 모습은 뭐라 형언할 수없이 안타깝고, 가련하며 한없는 절망감을 주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채워준 관념과 도덕과 윤리라는 족쇄를 풀어버리면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언젠가 노신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노신은 말한다.
집을 나간 노라는 죽었거나 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놀라운 통찰력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실은 지나치게 가혹하며, 우리는 토끼보다 더 약한 존재임을 노신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활의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소녀를 매일 밤 커다란 다라이 속에서 몸을 씻겨주는 노인의 투박한 손에서 느껴지던 에로티시즘이 어쩐지 가슴 아팠다.
그리고 노인에게 속삭였다. '사랑한다면 보내줘!'
김기덕 감독은 이기적인 속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가막히게 잘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그의 테마에서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글쎄 노신이라면 어떤 대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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