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어. 중국에 가신 이모대신 화초에 물을 주러 일주일에 한번 빈집엘 가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서 베란다 문을 열고 환풍을 시킨 뒤 화초에 호수로 물을 주는 거야. 물을 주고 나서 냉장고에 있는 물 한 컵을 따라 마신 후, 나는 이모의 주문대로 화장실 변기와 개수대에 락스 몇 방울을 떨어뜨렸어. 이렇게 해서 빈집에서의 용무는 끝났지. 우산을 들고 빈집에서 나온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빈집으로 향했어.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식구들이 밖에 나가 비워 놓은 집. 그런 빈집을 왕복하며 빗속에 선 나는 집에 돌아가면 김기덕의 빈집을 보리라고 마음먹었지.
1. 그가 어떻게 아무도 없는 빈집을 찾아다니게 되었는지. 왜 빈집에 들어가서 그집 주인의 칫솔을 사용하고 옷을 입은 다음 정성들여 손빨래를 해놓는지. 아무 설명도 없어. 단지 빈집에서 일상생활은 계속되는 거야. 혼자서 요리를 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잠이들지. 그는 빈집을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청소를 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나와. 마치 의식을 치루듯이. 다음엔 셀프카메라. 빈집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이나 사진작가의 집에 걸려있는 흑백사진을 배경으로 셀프카메라를 찍어두지. 이것도 한가지 의식과 같아.
2. 어느날 남자는 빈집에 들어갔어. 남편에게 맞아서 온통 멍투성인 여자가 있는지 몰랐던 거지. 열쇠구멍에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다니다가 전단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은 집을 열고 들어가던 남자에게는 어쩌면 예상치 못한 일이지. 여자가 빈집에서 며칠씩 문밖 출입을 안 하고 틀어박혀 있었다는 걸. 빈집인줄 알고 들어간 곳에서 남자는 욕탕에 물을 가득 채우고 들어가서 여자의 누드사진집을 물 속에 잠긴 채 넘겨보고 있지. 그런 남자를 지켜보는 여자. 여자는 그림자처럼 남자를 따라다니지. 혼자 밥먹는 남자, 남의 침실에 들어가서 자위하는 남자. 남자는 여자가 벗어 놓은 브래지어와 팬티 등을 빨아서 예의 의식처럼 탁탁 털어서 햇볕에 말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의 얼굴엔 알록달록한 멍자욱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지. 이윽고 남자 앞에 모습을 나타낸 여자. 남자는 급히 집을 나가버리지. 여자는 그저 빈집에 홀로 남겨진 채고 말이야.
3. 남자는 다시 빈집의 여자를 찾아가. 찾아간다기 보다 다시 돌아갔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지도 몰라. 그는 여자의 집에서 빨레를 하고 망가진 체중계를 고치고, 언제부터 멈추었는지 모를 벽시계를 고치지. 여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고, 여인의 화초에 물을 주는 남자. 때가 되어 여자의 남편이 돌아오고 마침내 여인은 남자를 따라 남편의 집을 떠나는 거야.
4. 이제 그들은 함께 빈집을 찾아다니지. 빈집에 들어갈 때마다 남자는 '흑인 오르페'의 주제곡이었던 '카니발의 아침'을 틀어놓거든. 어찌나 슬픈 멜로디인지 이런 의문을 갖게 해. 카니발이 시작되는 아침이라면 조금 더 신나게 불러줄 수는 없을까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대학에서 째즈에 목숨을 건 선생의 강의가 생각났지. 째즈 입문 시간에 '흑인 오르페'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여러분들은 축제가 끝나고 난 후의 황량하게 변한 마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축제가 끝난 슬픔을 말이죠." 아무튼 '카니발의 아침'은 그렇게 절묘하게 이들과 빈집을 흔들어주지. 그들이 앉은 타인의 소파, 그들이 사용하는 타인의 옷, 타인의 방에서 그들은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그곳에 존재하지.
5. 그들이 선택한 한옥집에서 처음으로 키스를 나누는 장면. 빈집에서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어. 여자의 맨발이 보이고, 남자는 양말을 신었지. 여자는 조심조심 남자의 발에 가까이 다가가서 맨발을 그의 발에 올려 놓지. 보고 있는 나까지 사람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해. 남자는 미소로 답하고 이들은 오래도록 키스를 나누는데 짧고 아쉬운 느낌을 줄 정도의 긴 키스라고 해둘게.
6. 한번은 노인이 폐암으로 죽어있는 빈집에 들어갔어. 방바닥에 누워있는 노인의 팔 사이에 개 한마리가 애처롭게 그들을 올려다 보고 있을 뿐. 그들이 노인의 시체를 깨끗이 염을 한 다음 수의를 입혀서 집 앞에 묻을 때까지 노인의 개는 보이지 않아. 개를 풀어주었을까... 여기까지 썼을 때 앨리스가 다가와 내 의자 위로 까치발을 하고 앞발을 버둥 거리는 통에 무슨 말을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모두 깨끗이 사라져버렸어. 너무 오랫동안 앨리스를 내버려두었나봐. 심심해 하는 눈치야. 앨리스를 안아 올려서 무릎에 앉힌 다음 다시 써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