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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Apr 28. 2019

2046


1.
 2046을 보면서 손톱 밑을 뜯으며 생각에 잠긴다.
창문을 통해 골목을 뛰어가는 구둣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걸까?
2005년 1월 28일 밤인데 나는 이미 한 해가 저물고 있는 연말인 듯한 기분이 든다. 2046 안에선 몇 번인가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왕선생의 딸은 신문사에 몰래 들어가서 장거리 국제전화를 건다.
나도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고 싶어진다. 장거리 전화를...

2.
여배우들의 한쪽 눈에서만 눈물이 흐른다.
왤까?
화면이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자막이 바뀌지 않는다.
지난주에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파인애플 아미를 읽었다. 무의미하다. 왜 무의미하냐면 다음주면 까맣게 그 내용을 잊어버릴 테니까.
2046은 기억에 관한 영화다.
남자가 계속 여자들을 울게 내버려둔다. 남자 혼자서 그녀들을 다 안을 수는 없겠지.
차례 차례 그녀들을 안아주면 아마 그녀들은 화를 낼거다. 아니 어떤 여자는 잠시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울음을 그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여자는 안겨서 다른 사람을 그리워 할지도 모르고, 그밖의 다른 여자는 안기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갔다왔는데 남자가 기다려주지 않고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3.
 "어떤 것들은 영원히 다른 이에게 빌려주지 않아."
마지막 대사가 나오고 영화가 끝났나 했더니 도시의 푸른 밤풍경 사이로 LG전광판이 붉게 빛난다.
눈이 부시다. 고통으로 얼굴을 잠시 찡그린다.
2046은 이런 영화였다.

 "왜 우리는 예전과 같을 수 없을까?"
 "그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는 아주 길고 긴 열차에 앉은 것처럼 아득한 밤기운 가운데 흐릿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2046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만 한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2046에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갔던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4.
 2046 안에서 남자가 묻는다.
 "나와 함께 떠날래?"
여자는 대답이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대답이 없는 여자의 한쪽 눈에서만 눈물이 흐른다.
2046 안의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건 남자가 눈물대신 영원한 기억의 열차에 방금 막 탑승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걸 아는 것만큼 연인에게 슬픈일이 또 어디있을까.

2005/01/2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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