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온도
엄마를 돌보는 마음에 대하여 누군가 묻는다면 ‘마지막 잎새’를 그리는 심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침대 위에서 베란다쪽을 보며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세탁기가 흔들려서 고치고 싶어.
나는 잘 듣고 있다가 as 기간도 지나버린 세탁기를 고정시켜 줄 분을 섭외하기 시작한다. 엄마와 나의 대화가 ‘세탁기가 흔들려서 고치고 싶다’는 말로 마지막이 된다면 어쩌지, 조바심을 내면서.
지난주에 엄마는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쁜 날 나에게 조간신문을 던졌다. 늘 엄마와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잎새’의 심정으로 사는 나에겐 납득할 수 없는 마지막이었다.
이번주 엄마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세탁기를 고정시켜주려고 나타난 나와 212호 할아버지를 세탁기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했다. 세탁기 바닥은 헌 슬리퍼가 고정되어 있었다. 대신 살짝 비뚤어진 비데를 바로잡고 못 3개를 박아서 침대 위에 봉을 달아드리기로 했다. 모두 엄마의 주문이었다.
다음 다음날 엄마의 기분은 더더 나빴다. 못 3개가 당신이 원하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내집에 드나들지 말라며 고래고래 화를 냈다. 아무래도 이날 돌아가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와 나의 마지막이 이런 식으로는 끝날 수 없었다. 나는 찰리 채플린처럼 시계 안에 갇혀 시간을 돌리고 돌려서 엄마와 나의 좋았던 관계로 되돌리고 싶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께서 완고하셨다. 엄마의 욕실은 서서 샤워를 하게 고정되어 있는데 앉아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고정대를 설치하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할아버지식 봉사였다. 나는 선의를 뿌리칠 수 없어서 귀가 안 들리는 엄마에게 고함쳤다(어느틈에 평소에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던 보청기를 끼고 있는 엄마 발견). 엄마는 분명히 좋다고 했다. 드릴로 구멍을 뚫는 소리, 열어놓은 현관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 엄마가 틀어놓은 티브이 소리.
오늘 엄마는 기분이 좋았다. 최내과에서 영양제를 맞고 저녁에는 아이들이 성년이 되기까지 다녔던 단골 돼지갈비집에 가자고 보낸 문자를 읽은 모양이었다. 엄마는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정말이지 아장아장 걸어갔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나의 칼로리 섭취량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한다. 엄마가 기분 나쁜 날엔 다섯끼를 먹는다.
엄마의 못 3개가 그냥 못 3개가 아닐 때가 너무 많다.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못 3개를 박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하룻밤 사이 마음에 안 들고, 그 못만 보고 있으면 화가 나는 것이다. 엄마에게 화가 난 나는 남은 정은 다 떨어지고 오직 인류애에 기대어 한주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찻집에서 1시간 20분 동안 영양제를 맞는 엄마를 기다렸다.
확실히 최내과 영양제가 좋네. 맞고 나면 금방 걷는데 힘이 나.
엄마가 말했다. 인류애고 뭐고, 오늘을 엄마와 나의 마지막으로 해두는 건 어떨까? 나머지 날들은 진짜진짜 인류애. 엄마가 원하던 못 3개는 어쩌면 영양제였을지도 모른다. 비타민D와 다정한 의료진들의 손길. 그리고 어쩌면 아프지 않고 오늘밤을 잠들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
작년 여름 엄마는 자발적으로 섭식을 줄였다. 줄이자마자 점점 식욕을 잃고 누워만 있었고, 마침내 걷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모르는 척 3주 동안 3번 집에 간호사님을 모셔와 영양제를 맞혀드렸다. 첫날엔 눈을 하얗게 흘기며 자신의 마지막을 방해하는 적군(딸)에게 비수와 같은 폭언을 쏟아냈다. 신기하게도 영양제를 맞은 다음날은 식욕이 돌아오는지 엄마는 죽을 드셨고, 과일을 드셨고 다시 일어나 걸으셨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을 생각한다. 혼자 생활할 수 없다면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지 하고 생각이 미치는 건 똑같을 것이다. ‘마지막 잎새’와 같은 신호를 놓칠까봐 나는 두렵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다. 나의 인류애는 엄마의 돌봄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