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분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안정되어 보였다. 자신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딸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점심을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앉아서 tv를 보라며 침대에서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전날 저녁부터 밀린 설거지를 해내면서 동시에 엄마의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쁘지만, 오늘은 집에서 만들어 온 함박스테이크가 있고, 가늘게 채 썬 오이무침도 있고, 간식으로 편의점에서 사온 군고구마가 있기에 조리하는 과정 없이 상을 차리기만 하면 되었다.
방에서 엄마는 독백처럼 이렇게 말했다.
“어디 힘낼 때까지 힘내보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나는 안도한다. 그러면서 미소짓는다. 어쩐지 익숙한 내용이다.
엄마의 화장실 문에는 ‘전남대 박상철 교수’의 칼럼 복사본이 붙여있다.
따스한 비데에 앉아 볼일을 보면 싫어도 매번 읽게 되는 위치에 있다.
‘노화는 죽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라는 내용이 알기 쉽게 전개되어 있다. 이 글은 책방 ‘지하비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던 것을 한 장 얻어와 붙여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떠날 수 있고 두려움 없이 떠나려면 미련이 남지 않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기사 내용을 내면화한 엄마의 말에 기운이 난다. 이렇게 또 한고비를 엄마는 넘긴 것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왔다갔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럴 때 한 장의 칼럼이 도움이 된다면 엄마를 살리는 글들로 도배를 해두고 싶다.
나와 엄마는 서로 탐색한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상처를 건드려서 늘 대화가 중단된다. 그 또한 엄마와 나는 잘 알고 있는데 피해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말을 아끼고 있다. 돌봄에서는 엄마와 딸의 고유한 관계도가 균형을 잃고 마침내 엄마가 의존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더 어렵기만 하다.
‘힘낼 때까지 힘내보고’라고 말한 엄마는 힘내서 수저를 든다. 이제는 소화가 안 되기에 잘게 찢은 버섯볶음조차 식사용 가위로 조각내 드신다. 함박스테이크에 케찹 대신 맛간장을 쳐서 드시고 초고추장을 뿌린 얇게 썬 오이와 양파도 음미하며 드신다. 베란다에는 한낮의 햇살이 들어서있고 나는 잊었던 목마름으로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나또한 ‘힘내서’ 오늘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계단에서 엘리베이터로 다니며 리듬을 타야한다. 리듬이 꼬이면 투스텝으로 혹은 잔걸음으로 걷어내 회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