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 우리가 남겨야 할 것들
자식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
죽음 이후에 우리가 남겨야 할 것들
-자식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선배의 부친상이었다.
장례식 이후 며칠이 지나자 촬영감독 h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얼마 전에 부친상을 당한 선배의 아들이었고 조문을 마치고 일어설 때까지 내곁에서 말벗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h가 좋아한다고 해서 영화 원작자가 있다는 사실과 국내에 소개된 미야모토 테루의 단편들을 알려주었다.
h의 아빠, 엄마이기도 한 선배 부부는 같은 서클이었기에 38년 전부터 기억을 공유한다. h는 그날 내곁에서 아빠의 중학교 시절 추억을 처음 들었다고 한다. 옛이야기를 청해 듣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그날도 선배의 잊혀졌던 기억을 불러낼 수 있어서 좋았다.
서클 선배들은 이제 중년을 넘겨 노년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선배 장인어른께서는 위가 불편해서 찾아간 병원에서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그 진단을 받은지 5일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부부인 s선배는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를 잃은 s선배와 y선배는 부부인데 서먹서먹한 채이다. 수억광년을 함께 서클 활동을 하며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그들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왔고, 빈둥지증후군이 다녀갔으며 허무와 불면의 밤이 부부를 뾰족한 세월의 가시로 상처를 냈었다.
그런 어느 날인 것이다. 서로의 상실과 상처를 외면한 채 피하고 살다가 장례식장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두 분 모두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선배들 사이에 낀 아들 둘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청년 h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에게서 성실한 답이 왔다.
좋은 책과 글 , 영화 감사합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정신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 속이 훈훈해지네요 ! 엄마 , 아빠 그리고 할머니께는 제가 더 열심히 해야죠.
아빠의 오렌지 색 남방 이야기는 보통 저희한테 해주시는 이야기에선 들을 수 없는 질감을 가지고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네요.
내가 대답했다.
아버지도 너처럼 꿈이 있었을거야.
그런데 가족들과 살다보니 잊혀졌을거고.
박완서의 소설은 실향민들을 주인공으로 쓰고 있는데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는 서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으니까 참 고된 삶을 사셨을테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 훌륭하고 성스러운 세계를 꿈꾸지만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느 사이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있으니까.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서사를 가족들과 나눌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겠지.
h가 한참 후에 답을 줬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엄마나 아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는데 말씀하신 지점들은 알고는 있어도 되새겨 본적은 없는것 같아서 새롭네요 감사합니다 !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죠.
나는 좀더 용기를 내어 간섭하기로 했다.
수많은 예술작품은 가족 이야기부터 시작되니까 아빠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인터뷰 요청을 하면 기꺼이 알려주실거야. 너를 통해서 아빠, 엄마가 전보다 끈끈한 유대를 가지시리라 믿는다.
부모는 자식 말은 잘 들어주니까.
그러자 h에게서 통화를 하고 싶다는 문자가 왔다. 그리고 통화 마지막에 h는 울었다.
부모님 사이에서 혼란한 시기를 통과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빠쪽에 가 있으면 엄마가 걱정되고, 엄마쪽에 가 있으면 아빠쪽이 걱정되는 소모적인 감정들.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특히 아버지의 서사를 자신이 전혀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터져나오는 그리운 감정이 울음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눈물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사람의 감정은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힘드니까.
장례식장에서 s선배는 동생이 해준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내 동생도 영화를 좋아하거든. 안성기 주연의 <축제>라는 영화가 있다는거야. 장례식을 배경으로 하는데 중간에 아기도 태어난데.. 마지막에 가족사진을 찍는데 돌아가신 분과 태어난 아기가 있어서 가족 인원에는 변함이 없었다는거야.
남편인 y선배는 들었을까. 이 은유와 상징을..
언니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신비하다. 부모는 죽어서까지 자식을 돌보는게 아닐까. s선배 아버님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의 탄생을, 가족의 재결합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숙연해졌다.
- 나 어릴 적에/이미경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