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다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는 내 차지가 아니었다. 잠자리에서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동생과 누워서 서로 자기 엄마라며 싸우던 기억이 난다.
그런 엄마와 단둘이 생활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도시 변두리로 숨어들어 방을 구했다. 집도 넘어가고, 가게도 넘어간 상태에서 빈털터리가 된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한 그해 가을 은행잎은 정말 눈이 부셨다.
엄마는 그때까지 못해주었던 사랑을 한꺼번에 갚으려는 듯 저녁이면 고등어자반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부엌일은 언제까지나 서툴기만한 엄마였지만, 열심이었다. 나는 당연하게 월급을 받으면 교통비와 약간의 용돈만 빼고 엄마에게 드렸다.
어느 날이었을까. 출근길에 엄마는 나를 따라나섰다.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온 것이었다. 은행잎이 그야말로 쏟아지는 가을날 새벽, 버스에 오르자 엄마는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마치 축구 응원석에서 응원을 하는 것처럼. 낙엽처럼 빈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이가 다 빠져버린 홀쭉한 얼굴로 엄마는 웃었다.
나는 엄마의 물건을 몇 가지 간직하고 있는데 하나는 결혼 예물로 받은 손목시계, 또 하나는 엄마의 어금니, 뿌리 채 뽑혀버린 어금니를 간직하고 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애쓰는 동안 엄마는 풍치를 치료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뿌리가 깊은 어금니가 뽑힐 때까지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니 그 어금니를 보면 나는 지금도 아프다.
우여곡절 끝에 12개월 할부로 맞춘 엄마의 틀니를 찾아온 날 우리는 밥상 앞에서 오랜간만에 웃었다.
“방금 마늘을 씹었어. 신기하네.”
엄마는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좋아했다. 그때부터 심리적인 엄마의 돌봄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기억은 훗날 돌보는 일에 지친 사람들과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튼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의 생활은 짧게 끝났다. 노란 은행잎이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펼쳐진 정류장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는 일도 끝이 났다. 그해 엄마는 조카들을 돌보기 위해 아들에게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