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by 이은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는 동안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박사가 내 아버지처럼 생각되어서 책을 읽는 동안 몹시 안타까웠다. 책 마지막에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던 박사가 마침내 요양시설에 맡겨지는 부분에서는 가슴에 따끔따끔 한 통증을 느꼈다. 박사와 헤어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슬펐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박사가 사랑한 수에는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박사는 영원한 수식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은 박사와 그런 박사를 도와 청소도 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온 파출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새로 온 파출부인 '나'에게 박사가 묻는다.

"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

"24인데요."

"오오, 실로 청결한 숫자로군. 4의 계승이야."

파출부인 '나'는 질문을 한다.

"계승이 뭐죠?"

"1에서 4까지의 자연수를 모두 곱하면 24가 되지."

박사의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된다.

"자네 전화번호는 몇 번인가?"

"576에 1455예요."

"5761455라구? 정말 멋진 수가 아닌가.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와 정확히 일치하는군."

박사는 자신이 하는 말을 파출부인 '나'가 잘 알아듣지 못해 혼란스러울 때면 말 대신 숫자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박사에게 숫자는 상대방과 악수하기 위해 내미는 오른손이며 동시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코트이다.

파출부인 '나'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 매일 아침 현관에서 숫자로 이어지는 대화를 되풀이 해야만 했다.

80분이면 기억이 사라지는 박사에게 현관에 나타난 '나'는 늘 처음 보는 파출부이기 때문에 박사는 아침마다 신발 사이즈와 전화번호, 우편번호, 자전거 등록번호, 이름의 획수 등을 묻는다. 파출부인 '나'는 어느새 박사와 숫자이야기 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녀의 생일이 220이라는 것을 안 박사는 자신의 손목시계에 새겨진 '학장상 No. 284'를 연결시키며 220과 284는 우애수이며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말한다.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파출부인 '나'와 박사는 친구가 된다.

1975년 교통사고 이후로 멈추어버린 박사의 기억. 정확히 1시간 20분이면 사라지는 기억.

박사는 매일 아침 옷을 입을 때마다 양복에 붙여두었던 메모지에 있는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를 읽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대학 논문으로 학장상까지 받았던 박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아침이 매일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출부인 '나'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데 어느 날 아이를 집에 혼자 있게 하고 일하러 나온다는 사실을 안 박사가 정색을 하고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고 당장 내일부터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조른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잊어버릴 거라고 얕보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말한 박사는 소맷자락에 붙어 있는 '새 파출부'란 메모지를 떼어내고 안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뒤에다 이렇게 덧붙인다. '와 그 아들 열 살.'

이렇게 해서 박사와 파출부인 '나'와 아들 셋의 일상이 시작된다.

박사는 '나'의 아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루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평범하던 수식도 박사에게는 훌륭한 의미를 갖는다.

관대한 기호 루트 이외에 220을 정말 귀여운 숫자라고 하기도 하고 11을 보고 참으로 아름다운 수이며 소수 중에서도 각별히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또한 박사가 '영'을 발견한 인도의 수학자 이야기를 할 때는 숫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이름도 없는 인도의 수학자였어. 이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공동욕탕의 화로에 던져진 그리스의 수학을 구해내고, 사라진 정리를 부활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진리를 탄생시켰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없으니까 숫자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했지. 그런데 언뜻 정당하게 보이는 이 논리를 뒤집은 사람이 있었지. 무(無)를 숫자로 표현한 거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했지. 정말 멋진 일 아닌가."

박사는 '0'을 발견한 인도의 수학자 덕분에 38과 380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38은 10이 세 개, 1이 여덟 개며 308은 100이 세 개, 10이 0, 1이 여덟 개로 10자리는 비어 있는데 그 빈자리를 0이 기호로 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파출부인 '나'는 박사와 만나게 되고 음악이나 이야기를 상상하듯 숫자와 기호를 상상하는 버릇을 갖게 된다.

박사와의 만남은 루트가 10살 때 시작해서 박사가 요양시설에서 보내진 후 로도 계속되다가 마침내 루트가 중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수학 선생님이 되기 직전인 22살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사람의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전기선처럼 끊어진 기억과 기억을 연결해줄 수는 없을까.

나는 박사가 파출부인 '나'와 아들 루트와 처음 간 야구장의 기억은 물론 바로 어제의 일도 기억 못한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그리고 아침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를 보고 슬퍼하던 박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 가슴이 조여들었다.

박사는 말한다.

"실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수학의 질서가 아름다운 거야.

"소수의 성질이 분명해졌다고 해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있다 해도, 수학의 발견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응용되는 사레는 얼마든지 있어. 타원 연구는 혹성의 궤도를 밝혀주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우주의 형태를 제시했지. 소수 역시 암호의 기본으로 전쟁을 돕고 있어.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것은 수학의 목적이 아니야. 수학의 목적은 오로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있어."

박사는 수학잡지의 현상금이 걸린 문제풀이에서 1등을 하지만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일단 종결된 증명에 관해서는 놀랍도록 담담하다. 있는 힘을 다 기울인 대상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조심스럽게 입이 무거워진다. 자신이 얼마나 정열을 기울였는지도 피력하지 않고,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정말 완전한지 아닌지를 확인한 후에는 그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인 것이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한다.

파출부인 '나'는 박사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나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인데... 하는 겸손이 흐르고 있었다'라고.

나의 마음속에도 박사의 마음이 씨앗이 되어 자랐으면 좋겠다. 어떤 일을 할 때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가 어린 루트를 대하는 마음 또한 닮고 싶다. 박사가 어린아이에게 쏟는 애정, 그리고 그 의무를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여겼던 모습 속에서 한없는 사랑을 느꼈다.

게다가 어린 루트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의 진지함도 닮고 싶고 어린 루트가 수학문제를 풀 때 엉뚱한 실수를 해도 강바닥의 모래에서 사금 한 알을 캐내듯 잘한 점을 찾아냈다는 부분에서는 오랫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생각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 두고 싶은 것은 박사의 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입장이다. 꼭 기억해 두었다가 지치고 힘이 들 때 다시 읽고 기운을 내고 싶다.

'문제를 만든 사람은 답을 알고 있지.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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