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31일 중에 열흘이 쉬는 날이 었는데 그 열흘 중 아이들 학교에 간 날을 헤아려보면 모두 7일을 학교에 출석했다.
매년 연중행사처럼 아이들의 엄마대행으로 '학부모회의'에 참석했으며 막내 조카의 중학교 입학식이며 수학영재 오리엔테이션, 수학영재 입학식을 포함해 거의 학교에서 휴일을 보내게 된 셈이다.
중학교에 들어 간 조카의 학부모회의 날이었다.
담임선생님과의 면담 후 교실로 찾아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빈 교실에는 한 소년이 교실을 지키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자 그 소년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누구세요?"
"응, 민이 고모. 넌 이름이 뭐니?"
"준이요."
"준이는 왜 교실에 있어?"
"오늘 당번이라 점심을 먹고 오는 아이가 올 때까지 교실을 지키고 있어요."
"준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수의사요."
"그래? 우리 집에 말티즈랑 페키니즈를 키우는데 나중에 너의 병원에 가야겠네."
"저의 집도 말티즈를 키워요. 저는 장학금을 받아야 해요."
뜬금없이 장학금 이야기를 하는 준이 얼굴을 본다.
"왜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작년 7월에 아빠가 돌아가셔서 엄마가 일을 하시거든요."
잠시 뜸을 들이던 준이가 말한다.
"그런데 아빠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어요."
"왜? 술을 마셨니?"
"예. 술을 많이 마셔서 돌아가셨어요."
나도 준이처럼 한동안 말이 없다. 순식간에 준이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몇 시에 오시니?"
"12시쯤. 어떨 때는 1시에도 오세요."
"그럼 그때까지 혼자 있니?"
"아니요. 누나 셋이 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네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줄게. 넌 종교가 있니?"
"아니요... 그런데 저는 공부를 못해요."
준이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드는 나.
"그래? 우리 민이는 수학을 잘 하니까 준이가 모르는 수학이 있으면 가르쳐주라고 할게."
"정말요?"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잇는다.
"저는 친구가 없어요."
나도 잠시 할말을 잊는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준이가 다시 말을 건넨다.
"민이는 좋겠어요."
"왜?"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니까요."
나는 아이를 눈여겨 본다.
그렇다. 준이는 수의사가 되고 싶고 장학금을 받아야 하며 공부를 못하고 친구가 없다. 이제 갓 중학생이 되는 아이가 감당하기는 너무 벅찬 현실이다. 아이는 누군가에게는 이런 감정을 표현해야 하고 마침 그 대상이 내가 된 것이다.
이윽고 한 아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다.
“어, 반 친구가 오면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했지? 나가 버렸네."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되요."
"아니지. 집에 가면 너무 늦잖아."
잠시 후에 다시 한 아이가 교실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려 한다.
"얘, 준이가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니까 교실을 좀 봐주렴."
"저.는. 청소하러 가야해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청소하러 가야 한다는 아이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철이였다.
"5분만, 5분만 기다려줄래. 준이가 금방 점심을 먹고 올테니까." 내가 사정을 한다.
나가려던 철이가 엉거주춤 서서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점심을 먹으러 준이가 나가자 이번에는 교실에 철이와 내가 단둘이 되었다.
"넌 왜 점심시간에 청소를 하러 가니?"
"수업받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해요."
철이의 말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마 철이는 반친구들과 달리 분반 수업을 하는가 보다.
잠시 후 철이가 문쪽으로 가버린다.
나는 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그냥 내버려둔다. 오늘은 내가 교실 당번을 하면 되니까. 당번일 때 친한 친구가 없으면 점심을 굶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친구가 없다는 준이 는 어쩌면 학기 내내 당번일 때면 집에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엄마가 없는 빈집에서 챙겨먹는 점심.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 놀던 조카가 교실로 왔다. 점심 시간 다음 수업은 공개수업. 마침 음악수업이라 이동수업을 하는 조카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교실로 향하는 나.
조카의 음악책은 겉장이 완전히 뜯겨 있다.
"왜 새책이 이 모양이니?"
"민영이가 음악시간에 빌려가서 찢어 왔어요."
민영이는 학교 주먹이다. 아이들 말로는 축구부 짱이다. 민영이와 민이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중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민이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 교복입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초등학교로 갈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고모 욱이가 학교폭력 117에 전화를 하면 엄마, 아빠가 아시겠지 하고 말했어요."
"왜, 민영이가 아직도 때려?"
"예. 민영이가 학교 끝나고 남으라고 하는데 욱이는 무서워서 싫은데도 남아야 해요. 저는 남으라고 해도 안 남는데."
"넌 무섭지 않아?"
"예. 전 무섭지 않은데 욱이는 무서운가 봐요."
나는 일전에도 욱이가 민영이가 자꾸 때려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조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화가 났다. 친구가 친구를 무서워 하다니.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조카와 나는 몇 주 전에 졸업한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조카는 졸업 후에 담임선생님을 찾아뵌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쁜 듯했다.
빈 교실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던 담임선생님.
6학년 2반 담임선생님께서 이번에는 5학년 교실에 계셨다. 민이가 졸업할 때 카이스트 장학금을 받도록 추천해주시기도 했던 고마운 선생님께서는 민이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방금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들이 다녀갔다고 알려주신다.
조카와 난 세상에 우리가 제일 먼저인 줄 알았는데 하는 표정이 되었다.
인사를 마치고 민영이의 이야기를 꺼내자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셨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줬지?"
민이와 담임선생님만이 알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갔다.
"예. 그런데 욱이는 무서운가 봐요."
선생님께서는 그 또한 알고 계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인사를 마친 조카와 내가 초등학교 교문을 나오는 동안 나는 욱이 어머니께 문자를 보낸다.
'욱이가 117에 민영이를 신고하면 엄마, 아빠가 아시겠지 하고 걱정을 했답니다.'
음악책이 찢겨진 것을 보면서 나는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문자를 받은 욱이 어머니께서는 상황파악이 잘 안 되셨는지 욱이가 민영이를 쫓아다닌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아들이 얼마만큼 고통스러워 하는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어쨌든 욱이 어머니는 어떤 식으로든 민영이 어머니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겠지. 그리고 민영이는 야단을 맞았겠고.
야단을 맞은 민영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말한 민이에게 어떻게든 앙갚음을 할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민이가 맞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음악책을 찢은 것으로 끝이 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민이가 새책을 찢어서 혼이 날까봐 음악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연세가 지긋하신 음악선생님 왈,
"서열싸움 하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에서 제일 힘이 쎄다 하는..."
음악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조금 알 것도 같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동물의 왕국처럼 지금 서열싸움이 한창인 것이다. 서열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생긴 문제를 이야기했을 때는 바로 행동에 들어가는 것보다 잠시 지켜보다가 피해자 부모님께 익명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내키지는 않지만 조금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 민영이라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SOS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외롭다. 나는 힘들다. 내 이야기를 좀 들어다오.
그런 아이의 외침이 몇 년씩 외면당했을 때 아이는 힘으로 친구들을 괴롭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하는 건 아닐까. 민영이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민영이의 이야기를 들어 줄 어른, 빈 교실에서 친구가 올 때까지 점심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준이의 이야기를 들어 줄 어른. 아니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는 나의 마음을 알아 줄 친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