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드 뭉크

영혼의 시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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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서둘러 전철에 오른다. 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 나는 투잡, 쓰리잡도 마다 않는다. 면세점 근무가 쉬는 날 어렵게 얻은 통역 알바가 예상 시간 보다 2시간 일찍 끝나자 나는 벼르고 벼르던 뭉크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 명동역에서 전철을 탄다. 한가람미술관 도착시간 5시. 표를 끊고 마침내 전시회 안으로 들어선다.

전시장 벽에 소개된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읽기 시작한다.

‘그는 기존의 회화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동시대 부르주아들과 보수적인 미술평론가들을 도발하였고, 19C 후반 유럽의 예술과 문학에서 일어난 모더니즘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은 강렬하고 역동적이며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전시 작품들을 통해 전반적으로 드러나며, 이 전시의 포문을 여는 뭉크의 회화 ‘지옥에서의 자화상’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지옥에서의 자화상’ 앞에서 뭉크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뭉크의 작업실을 위에서부터 조명한다. 등잔불을 받으며 붓을 든 뭉크. 그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서야 우리들 뇌로 인지된다. 방의 내부는 어둠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거울 앞에 나신으로 서 있는 뭉크와 캔버스만이 등잔불에 흔들리며 간신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끊임없이 모델을 필요로 했던 그들. 가장 손쉽게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모델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 아무도 모르는 어둠을 가슴에 가졌거나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격정적인 열정으로 고독했던 그들의 목마름을 표현하고자 그들은 자주 거울 앞에 섰을 것이다.

다음은 상실, 불안, 에로스, 사랑과 고통, 욕망, 붉은 방 등 6개의 소주제로 나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뭉크는 누이의 죽음을 회상하며 그 기억을 상실과 애도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로 전환시킨다.

불안, 뭉크의 불안의 모티브는 굴곡진 풍경에 에워싸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공통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이 얼굴들은 마치 뚜렷한 특색 없는 가면 같다. 그리고 작품 한 점이 즉각적으로 눈에 띈다. 불안한 대각선의 원근법과 풍경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선, 그리고 양손을 머리를 향해 들어 올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희미한 윤곽의 인물, 바로 ‘절규’다. ‘절규’와 함께 실린 뭉크의 글은 불안에 대한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인 실존적 경험을 보여준다. ‘절규’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그의 산문시가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불현듯 우울함이 엄습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추어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협만에 마치 화염 같은 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정신병력을 가진 집안의 유전자를 받았던 뭉크 역시 정신병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고 한 살 위인 누이마저 폐결핵으로 잃은 뭉크는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몹시 아름다웠을 법한 노을이지만 뭉크에게는 죽을 것 같은 발작 상태로 빠지게 한 저녁 노을이다. 뭉크는 왜 ‘절규’를 들어야 했을까.

나는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어째서 이 시간에 나는 ‘절규’ 앞에 서 있는 걸까. 쉬는 날에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음 날에도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나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는 걸까. 이번 전시회가 뭉크의 ‘절규’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작품은 내게 많은 메시지를 갖고 있다. ‘절규’가 가지고 있는 힘. 내 안에 있지만 표현할 길 없는 아우성. 박봉에 시달리며 병든 동생과 조카들과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내가 안으로 꾹꾹 삼키고 있는 감정의 덩어리가 ‘절규’를 통해 가공할 만큼의 힘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 이외에는 해결할 수 없고, 나 이외에는 기댈 곳이 없는 가족들, 모두 안아주고 보살펴야만 하는 가족구성원 속에서 분열되는 자아는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위로 받고 싶은 혼란스런 감정이 ‘절규’를 통해 어느 정도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분열된 자아를 통일된 주체로 만들려는 노력이 부질 없음을 안다. 정신이 아프면 아픈 대로 마치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뭉크의 ‘절규’는 외면하고 싶은 내면의 ‘절규’이기도 하다.

나는 ‘태양’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역시! 뭉크다’ 라고 감탄한다. 뭉크가 사람들의 불안, 우울, 고독, 슬픔만을 그렸다면 위대한 화가라 할 수 없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할 내일이 있으니까.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이 인간 내면의 어둠을 면밀히 표현함과 동시에 인간의 구원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다루었기에 현재까지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정신분열적인 현대인들이 뭉크의 ‘절규’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정의 끝에 ‘태양’이라는 작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빛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법이니까. 나 또한 고단한 일상을 감히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고 감정의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무가 쓰러지듯 한 번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할까 봐 안간힘을 쓰고 버티고 있으나 언젠가는 동생의 병도 회복되고, 조카들도 성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빛을 향해 걷는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뭉크가 찾은 ‘태양’은 나의 ‘태양’이기도 하다.

불멸의 화가,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하는 영혼. ‘달빛, 생클루의 밤’ 그림 속 그는 쓸쓸해 보인다. 창턱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피사체와 함께 마룻바닥 위에는 창문 틀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바둑무늬의 창문 틀은 밤새 갇혀 있는 ‘아픈 자아’이며 자신이 아프다는 것조차 모르는 척 무심해 보인다. ‘베란다 계단에서’의 신체가 굴절된 채 그려진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의 가면 같은 무표정. 유난히 청색을 많이 쓴 그림을 보며 화가들이 청색을 많이 쓸 때의 심리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한다.

뭉크의 그림들을 두 시간에 걸쳐 둘러 본 나는 그림에 대한 감상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다시 이동하기에 바쁘다. 나는 내일 아침 1시간에 걸쳐 인천공항행 전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하고 곧 있을 중간고사를 대비해 조카의 공부도 봐주어야 하며 일주일 동안 밀린 빨래도 해야 하고, 미루어 두었던 방통대 인터넷 강의도 들어야 한다. 분주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밤새 아픈 늑대처럼 자신의 방을 거닐어야 하는 뭉크가 되고, 그림자조차 굴절된 여주인공이 되고, 노을이 지는 풍경 속에 석판화처럼 굳어버린 ‘절규’의 해골이 된다. 어쩌면 ‘정원의 사과나무’처럼 열매들로 가득 찰 때까지 실존적 고통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번 전시회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기존에 내가 가진 뭉크에 대한 이미지가 불안, 우울, 죽음 등 어두운 것뿐 이었다면, 전시회를 통해 삶에 대한 긍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화가였음을 새롭게 안 사실이다. 또한 다양한 판화 제작과 함께 사진 및 동영상까지 시도한 실험적인 작가였다는 사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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