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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Feb 24. 2021

좋아하던 가게가 문을 닫으면

크라잉 넛, <밤이 깊었네>

하수연가(2001)


크라잉 너트의 베이시스트 한경록을 좋아한다. 마흔이 넘어도 해적 선장 모자를 쓰고 다니는 로맨틱, 남녀노소 모든 팬에게 친절한 젠틀도 좋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직 그만 쓸 수 있는 노래들.


서른셋이 넘으면 더 이상 새로운 노래를 찾아 듣지 않는다는 글을 어디서 읽었다. 과연 그러했다.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사춘기 시절 좋아한 노래들이 빼곡한데, 그중 가장 많이 듣고(라이브를 포함해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아마도 밤이 깊었네.


같은 곡을 이십 년 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부르다 보면 기억이 겹겹이 쌓인다. 노래를 들으면 처음 CD를 사서 포장지를 벗기고 종이 냄새를 맡던 날, 더듬더듬 코드를 짚으며 기타 치던 날, 이어폰으로 들으며 술에 취해서 밤거리를 비틀비틀 걸었던 날이 모두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골 술집에 가듯이, 가끔 혼자 방에서 눈을 감고 듣는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음악여행 랄랄라가 되어, 하나 둘 피어오는 기억들을 여기저기 헤집으며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게 된다. 역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기억은 한 클럽에서 라이브로 처음 들었던 날.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라이브를 봤지만 그때의 조명 온도 습도까지 기억하는 것은 처음 들은 날이 유일하다.


갓 군대 제대했다고 무대 위에서 인사하던 관객을 다 함께 머리 위로 넘기던 기억, 연속으로 뛰고 지쳐서 플로어 뒤에서 버드와이저를 마시던 기억, 2층 테라스 사람들은 물을 뿌려대고, 한경록이 바지를 벗었었나 안 벗었었나... 그러다 보컬 박윤식이 봠이 깊-었-네 에, 하고 첫 소절을 떼던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플로어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며 무대를 보고 있다. 둥실둥실 옆으로 움직이는 관객들의 머리가 보인다. 모히칸, 빨간머리, 레게머리, 빡빡이, 토끼... 왜 클럽에 토끼 잠옷을 입고 오는 거야?  땀이 맺혔는지 연기에 가렸는지 무대가 자꾸 부옇게 보인다. 조명이 번져서 잘 볼 수가 없다. 애써 눈을 비비며 이상면의 기타에 맞춰 가지 마라 가지 마라를 외친다.


홍대 라이브 클럽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심지어 청담동 블루문도 닫았다) 엄혹한 코로나 시대.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한 반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펑크록 소년소녀들은 망원동으로, 문래동으로 달려가 토끼 잠옷을 입고 롹앤롤과 Oi를 외치겠지만, 어엿한 아저씨가 된 나는 왠지 못내 섭섭하다. 요즘 들어 점점 더 기억 속의 그 무대가 부옇게 보이는데,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또 봐야 하는데, 다신 그러지 못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항상 당신 곁에 머물고 싶지만

이 밤에 취해 (술에 취해) 떠나고만 싶네요

이 슬픔을 알랑가 모르겄어요

나의 구두여 너만은 떠나지 마오


하나 둘 피어오는 어린 시절 동화 같은 별을 보면서

오늘 밤 술에 취한 마차 타고 지친 달을 따러 가야지





요즘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 K>를 열심히 본다. 대중음악을 발라드, 댄스뮤직, 인디뮤직 등의 키워드로 나눠서 매주 방송하는데, 키워드의 중심에는 공간이 있다. 이태원 문나이트, 홍대 드럭-블루데빌, 대학로 학전 같은.

이제는 사운드 클라우드, 유튜브가 있으니 앞으로는 골 아프게 임대료니 방역이니 정부 지원 기준이니 고민할 필요가 없으려나. 와이파이 젠트리피케이션이 생기지는 않겠지.


크라잉 너트는 활발히 유튜브를 하며 25주년 기념 앨범도 새로 냈고, 올해 경록절은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그래도 좋아하던 가게들이 사라지는 것은 마음 아프다. 함께했던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이제 끝 너도 떠나야 해,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시트콤 <프렌즈>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https://youtu.be/smhevntPh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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