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Re Mix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리케인봉 Mar 01. 2021

서울 이 곳은

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

씨 없는 수박(201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겨우 찾은 방은 월 20만 원짜리 고시원이었다.


옷가방을 껴안고 처음 고시원에 들어가던 날, 몽구스처럼 생긴 총무가 심드렁하게 맞으며 "창문이 있는 방이라 구하기 힘들어요" 라며 생색을 냈다.

나는 그를 따라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복도를 걸어 들어가며, 불이라도 나면 나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과연 방문 앞에는 문민정부 이후로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소화기가 먼지가 부옇게 덮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을 딱 열었을 때, 그곳에는 정말 방이라기보다는 관에 가까운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으며 낄낄댔었는데, 그곳의 묘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아니 그 소설은 6 공화국 시절 얘기 아닌가?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총무는 "뭐 잘 아시겠지만 방음이 안 되니깐" 하더니 슥 사라졌다.


스무 살이 <논스톱> 같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베스트극장 정도는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박민규라니. 몰라 몰라 박민규라니.


옥상에서 담배만 거푸 피우다 조심스럽게 들어와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고 누웠는데,


총무가 그렇게 생색을 내던 손바닥만 한 창문 밖으로 불빛이 아른거려서,


이것 참 왠지 엄마 생각도 나고 해서,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며,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삼백에 삼십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지하실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방공호가 아닌가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아요


평양냉면 먹고 싶네




고시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노래방에 나가던 누나들, 큰 소리를 잘 치던 환경미화원 아저씨, 국적을 알 수 없는 두 남자(말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정말로 고시를 준비하던 법대 다니던 선배.


모든 것이 <갑을고시원 체류기>와 똑같아서 나는 매일 감탄하며 공용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옥상은 넓고 조용해서, 나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로 옆의 고급 오피스텔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누구 것인지 모를 수많은 화분에 가끔 물도 줬다.


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몽구스를 닮은 총무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과 친해졌고, 자주 함께 밥을 먹고 수다도 떨었다.


옥상 올라가는 계단참에 이 고시원의 유일한 텔레비전이 있었다. 지상파 채널만 나오는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는데, 저녁마다 사람들이 모여 깔깔대며 시트콤을  봤다.


관 같던 방은 어느새 한번 누우면 일어나기 힘든 아늑한 공간이 되어 나는 아침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심지어 몇 번은 술 마시다 막차를 놓친 동기를 방에 데리고 와서 같이 자기도 했다. 신혼부부도 그렇게 붙어서 자지는 않을 것이다.


고시원을 나온 뒤 졸업과 취업, 이사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곳이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내가 스무 살 대학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살 날이 너무나 많이 남아서, 그곳에서의 삶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나이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몽구스 총무가 워낙 특이한 사람이었을 뿐, 대부분의 고시원 거주자는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알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한 평생 살고 싶네


평양냉면 먹고 싶네

먹고 싶네




그리고 부동산 아줌마의 자동차 조수석에 어색하게 실려 언덕길 동네를 오르내리던 스물몇 살의 어느 날, 이 곡을 처음 들었다.


이 아저씨 기타 무지하게 잘 치네, 하며 무심하게 듣다가 기어코 나는 스무 살 시절의 그 고시원을 떠올렸다. 지금의 방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보며 그때를 생각했다.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이제 나는 퇴근 후 혼자 저녁밥을 먹으며 유튜브며 넷플릭스며 이것저것 보는데, 가끔 그 옥상 계단참에 모여 수다를 떨며 작은 텔레비전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모여서 시트콤을 보다 보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누군가가 캔맥주를 사들고 올라오고, 또 누구는 믹스커피를 타 오고, 총무는 오늘은 누가 늦는데? 하며 오지랖을 부리던 언덕길 꼭대기의 그 아주 특이했던 고시원 풍경을 생각한다.


300/30은커녕 3억이 있어도 들어가 살 곳이 마땅찮으니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데, 바뀌지 않는 건 나와 그 고시원뿐인 것 같다.



https://youtu.be/hz5zgu8TTbQ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던 가게가 문을 닫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