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의 시(詩) 혹은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
프로 스포츠 리그 만년 꼴찌 팀의 팬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프로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고 숫자로 모든 프로야구 꼴찌 팀의 팬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프로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고 숫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특히 야구는 더더욱- 것인데, 굳이 약팀을 응원하면서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고, 경기가 끝나면 술이나 퍼마시면서 루저들의 소속감을 공유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프로야구는 아주 낭만적인 사업이다. 그게 아니면 이글스가 아직도 해체하지 않고,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구단주가 복싱과 의리를 사랑하는 낭만파 김회장이라 해도, 이쯤 되면 진작에 야구단 따위는 없애버리고 야구장에는 물을 채워서 대전시민을 위한 야외 수영장으로 운영하는게 옳다.
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그 팀의 팬들이다. 십 년 넘게 최하위권인 팀을 응원하면서, 부처님 가면을 쓰고 행복하다고 외치는 미스테리한 사람들.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응원을 보고 있으면, 저 헌신적인 사랑의 원천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스트라이크 하나를 못 던져서 만루를 채워놓고는 허탈하게 한숨을 쉬는 투수를 보거나, 듣도보도 못한 창의적인 에러로 점수를 내준 뒤 수줍은 미소를 짓는 야수를 보면,
내가 지금 프로야구를 보고 있는 게 맞는지, 혹시 이게 모두 트루먼 쇼처럼 세밀하게 짜여진 지독한 블랙 코미디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내 얘기다.
나는 20세기 소년이라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 때 본 미국 영화, 일본 만화 속 야구는 정말 인생 그 자체였다. 그래서 1999년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역 연고팀을, 마침 그 해 우승했던 그 팀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 그 팀이 대차게 추락하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꿈일 거야. 나는 아직 1999년의 한밭야구장 외야석에서 낮잠을 자는 중이고, 아주 길고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인생에 고통만 있을 수가 있나?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는 것이 인생인데, 나는 우산장수와 부채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꼴찌팀 팬 특유의 자학을 일삼으며, 10점 차로 지고 있어도 행복하다고 외치는 '야알못'들을 비웃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나는 진작에 꿈에서 깼고 바로 지금이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20세기는 끝난 지 오래고, 한밭야구장은 사라졌고, 실제로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짜 '야알못'은 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구는 정말 인생과 닮아 있었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이글스의 날씨는 흐린 날이 열흘이면 맑은 날이 하루가 될까 말까 한다. 그러나 잔뜩 흐린 하늘에도, 구름 사이로 빛이 비치는 실버 라이닝의 순간이 존재한다. 어릴 적 보았던 포수 미트에 총알처럼 꽂히던 정민철의 패스트볼과, 아름답게 밤하늘을 가르던 장종훈의 홈런 같은 화려한 기억들도 있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2013 시즌의 일이 가장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고된 20대를 지나가던 그 해 봄, 나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보이는 것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저녁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매일 집을 나와 아무 데나 걸어 다녔는데, 그때마다 이어폰으로 이글스 경기 중계를 듣곤 했다.
이글스는 매일 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졌다. 개막 5연패를 할 때까지도 올해도 이러네, 하던 사람들이 10연패를 하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떠들썩하게 모셔온 전설의 명장, 김 감독은 머쓱하게 자기도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고 인터뷰를 했다. 선수들은 늘 그렇듯이 전혀 기대되지 않는 삭발을 했다. 매일같이 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나도 초조해졌다. 기어코 개막 최다 연패 기록을 세우자, 다음 경기에서 만날 신생 팀만이 연패를 끊어줄 수 있다고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그날 경기는 집에 앉아 TV중계로 봤다.
5회 말, 김태균이 역전 홈런을 치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김태균이 홈을 밟자 관중석의 팬이 눈물을 흘렸는데, 나도 그만 따라서 눈물을 줄줄 흘려버린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2002년 월드컵 때도 안 울었는데 왜 지금? 나는 당황해서 눈물을 멈춰보려 했지만, 눈물은 끊임없이 펑펑 솟았다. 마치 송창식이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하며 내 등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그 경기는 결국 이글스가 이겼다. 세이브를 한 송창식도, 결승타를 친 김태균도, 전설의 명장 김 감독도 울먹이며 인터뷰를 해서 나는 한번 더 울었다. 그렇게 나의 뒤늦은 사춘기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