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순한 맛

Remember Me

호박범벅

by 꽃반지

뭐지! 폭탄인가?


냉동실 문을 열자마자 새카맣고 둥근 물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발등 바로 옆에 떨어졌다. 쿵. 발등 위에 떨어졌다면 쿵, 에 이어서 쩌저적 하는 소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어린 아버지는 별자리 이름을 가진 큰 제과 회사에 다녔다. 어느 날 그는 경품 하나를 장모님 댁으로 보냈고, 의문을 박스를 받아 든 노인은 안에 폭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고민하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구석에 가서 끌러봤다고 한다. 누군가가 폭탄을 보낼 정도로 원한지고 사셨던 걸까.


할머니 앞으로 온 폭탄의 정체는 종합과자세트였고, 내 발등을 쪼갤뻔한 폭탄은 시커먼 비닐봉지에 싼 삶은 단호박이었다. 뭐든 대량 구매하는 습관 때문에 어느 날 단호박을 몇 키로 씩 사제꼈겠지. 그러다 처치곤란이라 삶아서 냉동실에 처박았겠지. 그리고 새카맣게 잊었겠지. 그리고 이렇게 호박을 보면서 할머니를 꺼낸다.


호박으로 무엇을 만들까요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어린 내 입맛에도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맛이었다. 할머니의 손이 닿은 음식은 무슨 음식이건 한번 씹고 뱉어냈다. 내가 누군가. 다른 애들은 써서 안 먹는다던 보약도 몸에 좋다면 숨도 안 쉬고 한 사발을 꿀꺽꿀꺽 마신 뒤, 약효 떨어질까 봐 엄마가 내민 사탕조차 거부하던 다섯 살이다. 그런 내 입에도 할머니가 만든 것들은 영 고역이었다. 단 하나, 호박범벅만 빼고.


할머니표 호박범벅은 진짜 끝내줬다. 내 인생의 첫 호박범벅이기도 했는데 밖에 나가서 사 먹으면 절대 그 맛이 안 났다. 너무 달거나 너무 묽거나 너무 듬성듬성했다. 할머니표 호박범벅은 숟가락이 푹 들어가지 않는 쫀득한 찰기를 시작으로, 한 숟갈 뜨면 강낭콩이며 새알심이 가득하고, 입에 넣으면 호박의 단맛이 은근하게 퍼졌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엄마한테 해달라고 조를 순 없었는데, 세상 모든 음식을 맛깔스럽게 하는 엄마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싫어하는 음식이 바로 호박범벅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표 호박범벅이 어린 내 입에만 맛있던 게 아니었는지, 가족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고 그 덕에 할머니는 호박범벅만 주야장천 만들었다고 했다. 이건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빠가 절대 감자를 안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성인이 되어 요리를 곧잘 하게 되면서 - 정확히는 곧잘 '도전'하게 되면서 - 호박범벅에도 당연히 도전했다. 범벅의 정석을 배우기 위해 요리 잘하는 분을 찾아가 배운 적도 있다. 맛있었다. 그렇지만 그 맛은 아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할머니가 주방에서 어떤 요술을 부려 호박범벅만 맛있게 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어쩌면 늘 주방에서 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할머니를 가엽게 여긴 그 요정, 그러니까 신데렐라에게 호박마차를 만들어준 그 호박 전문 요정이 아시아에도 슬쩍 들렀을지 모르는 일이고.



처음에는 호박에 밀가루를 넣고 반죽해 국수를 밀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동안 먹고 싶었던 크로켓 생각이 나서 귀찮지만 밀-계-빵의 순서로 튀김옷을 입히고 단호박 크로켓을 만들어먹었다.


애니메이션 코코 OST 중에 <Remember me>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say goodbye
Remember me
Don't let it make you cry
For even if I'm far away
I hold you in my heart
I sing a secret song to you
each night we are apart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travel far
Remember me
Each time you hear a sad guitar
Know that I'm with you
the only way that I can be
Until you're in my arms again
Remember me


어른이 된 내가 너무 바빠서 호박범벅은 고사하고 점심시간에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그런 시절을 살고 있을 때, 할머니는 가끔 전화로 '서울이 조으나'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떠났다. 나에게 say goodbye를 하지도 못하고 먼 여행을 떠났다. 코코가 기타를 들으며 아빠를 추억하듯, 나는 단호박을 보며 할머니를 추억하게 됐다.


많이 조를걸 그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나만의 가장 완벽한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