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Mar 27. 2019

아무튼, 버스

그렇게 끝까지 가보고 싶다

애초에 버스는 내 삶에 있어 선택이나 취향의 영역이 아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어딘가에 가려고 마음먹는 이상 반드시 뒤따르는 필수불가결의 존재다. 택시 타기에 대한 개인의 애호와 추억, 여러 감상을 담은 책 <아무튼, 택시>의 첫 장에서 저자 금정연은 이렇게 고백한다.


누군가 내게 택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곤란해진다. 택시는 내게 다리나 마찬가지다. 좋아하기보다는 없으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다리보다는 택시가 좋다. 다리는 내 것이지만 택시는 내 것이 아니니까.


나 역시 누군가 내게 버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곤란해지겠지. 시간 엄수가 필수인 출근길이나 중요한 약속에 나갈 때는 지하철을 타는 편이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버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나는

1) 운전을 못 하는 데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전혀 없고 - 무섭다

2) 차가 없고 - 1)의 이유에서

3) 지하철을 싫어하고 - 창밖이 보이지 않으니까

4) 마음 놓고 택시를 타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한 - 여자라서, 미터기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

이런 나에게 정답은 바로 버스다.


버스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억은 -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는 어머니가 나를 둘러업거나 품에 안고 버스를 탔겠지 -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어느 오후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유일한 버스인 88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버스는 빛바랜 베이지 바탕에 어두운 녹색이 어우러졌으며, 언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모르는게 하나도없는, 인생의 베테랑처럼 보였던 어머니도 종종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곤 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버스가 드디어 눈 앞에 멈추면 꼭 버스 계단 위에 한 발을 걸치고 기사님에게 확인을 해야 했다.

'아저씨, 이거 시내로 가는 거 맞아요?'


바야흐로 버스의 르네상스 시대


지금이야 정류장마다 노선별 행선지와 방향을 적은 표지판이 잘 구비되어 있고, 언제 도착하는지도 분 단위로 알 수 있으며, 심지어 기다리는 버스에 사람이 많은지 적은 지, 버스가 일반버스인지 저상버스인지까지 알 수 있다. 게다가 환승도 시켜준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그야말로 버스의 르네상스 시대다. 이 시대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나는 버스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면서 자라, 훗날 영화 <패딩턴>에 등장하는 멋진 버스기사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실은 버스는 나보다 한 발 늦었다. 안타깝게도.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탔을 때가 아마 여덟 살, 아홉 살 즈음이었는데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뒷목이 빳빳하게 굳는다. 꽤 긴장했던 날이다. 버스가 언제 올지도 알 수 없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난관을 무사히 이겨내고 버스에 올라탔더라도 난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버스는 승차가 다가 아니다. 하차를 해야 비로소 완벽하게 버스 타기를 마쳤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을 타야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기한 데다 어머니의 당부까지 수차례 더해져 잊으래야 잊을 수도 없었지만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는 몰랐다. 내리려면 하차벨을 눌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차벨을 눌러야하는 타이밍같은 건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기에 그런게 존재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몰랐다.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지면서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고, 정류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혔다. 여기서 못 내리면 어떡하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언제 벨을 눌러야 하는 거지? 마침내 내가 내릴 정류장에 버스가 섰지만 마침 그 정류장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뒤따라 내리겠다는 나름의 술책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버스가 출발하려는 찰나,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어 하차벨을 눌렀다. 기사 아저씨가 나를 보고 물었다.

"여기서 내릴 거야?"

"네!"

그때 아저씨가 나를 그곳에 내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을. 버스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자라, 성인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고 자유로를 질주하는 어른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시력이 좋지 않아 버스번호를 잘못 보고 신나게 올라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여느 때와 다르면 의심할 법도 한데, 나는 늘 버스를 끝까지 믿는다 - 어느 공터에서 울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볼멘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던 밤이 있다. "왜 나를 이렇게 낳았어!" - 진짜 왜 이렇게 낳았나요. 죄송합니다 -  2인용 의자를 마치 1인용으로 착각하는 듯한 쩍벌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나도 다리를 쩍 벌리고 영역싸움을 한 적도 있으며 - 그는 마침내 오므렸습니다! - 좌석에 앉아 졸다가 굴러 떨어져 모두의 시선을 받은 적도 있고, 올라타려는데 기사 아저씨가 나를 못 보고 문을 닫고 출발하는 바람에 다친 적도 있다. 아! 결정적으로 내리는 가운데 하차문이 닫혀 한쪽 팔이 끼인 채로 몇 정류장을 질주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버스를 안 탈법도 한데 나는 줄기차게 버스를 탄다.


버스 사랑은 해외에서도 계속된다. 물가가 싼 여행지에서 대부분의 관광객은 빠르고, 깨끗하고, 편한 택시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나는 왠지 버스를 타게 된다. 마치 르네상스 이전의 버스처럼, 정류장도 어딘지 모르겠고 있다한들 꼬부랑글씨를 알아볼 수 없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버스를 겁도 없이 덥석 잘도 올라탄다. 베트남에서는 노약자석인 줄 모르고 빈자리에 덥석 앉았다가 모두가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는 바람에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고, 태국에서는 기분 좋게 버스에 올라탔다가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이닥치는 매연 때문에 깜짝 놀랐다. 2층 버스의 로망을 안고 올라탄 런던에서는 어떤 흑인이 나를 향해 대뜸 소리를 빽 질러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고 - 2층 버스 제일 앞자리라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 대만에선 오지도 않는 버스를 두 시간 넘게 서서 기다리다가 - 거긴 정류장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결국 나를 불쌍히 여긴 동네 주민의 배려로 그의 퇴근길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해변가를 달리기도 했다. 중국 친구와 방콕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끊었는데, 출발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버스기사에게 사정해서 '웨이트 어 미닛! 웨이트 어 미닛! 쏘리, 쏘리'를 연발하기도 했었고. 하얼빈에서는 '빵차'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버스를 타고 어둡고 쓸쓸한 중국의 거리를 달렸다.


나는 왜 버스를 탈까. 다니던 회사가 갑작스레 이전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왕복 세 시간 이상을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출근길이 있다. 6개월 넘게 고된 출퇴근을 반복하다 보니 시름시름 앓았다. 몸의 피로도 피로였지만 마음의 피로가 컸다. 왜인지 곰곰 생각해보니, 지하철은 창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정말로 괴롭게 했다.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의 모습은 어쩐지,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면 늘 맞은편 차창에 축 늘어진 나의 지친 얼굴만 반사되어 보였다. 나는 곧 회사를 그만뒀다.


금정연 씨가 '혼자 타는 택시를 가장 좋아한다'라고 밝힌 것처럼 나 역시 혼자 타는 버스가 가장 좋다.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버스 타기의 풍경은 대략 이러하다. 창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한낮, 펼친 책의 한 귀퉁이에 햇살이 살짝 걸칠 정도면 딱 적당하다. 버스는 텅 빈 것보다 사람이 조금 있는 편이 좋은데 한산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취향을 맘껏 드러내며 좌석을 선택할 수 있다. 노약자석의 노란 커버가 좋다면 과감하게 앉아도 좋다. 차창은 말끔하게 잘 닦여있고, 살짝 열린 창으로 바람이 가볍게 들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하차문엔 승객들을 위한 작은 휴지통이 있는 버스가 좋다. 기사님의 말없는 배려를 느낄 수 있으니까. 책 한 귀퉁이에 어른거리는 햇살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고개를 들면 익숙한 풍경, 혹은 처음 보는 풍경이 뒷걸음질 치며 사라진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는 내릴 정류장이 어딘지도 알고, 딱 한 정거장 전에 하차벨을 누를 줄도 알며, 대부분의 경우 - 종종 놓치기도 하지만-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지만 버스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으면 가끔은, 사실은 늘 내리고 싶지 않다. 번호를 착각하고 잘못 올라탄 버스처럼,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놀라면서, 과연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의심하고 끝없이 궁금해하면서,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마침내 도착한 곳이 어느 허허벌판이라도, 그때는 울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수 없더라도, 그렇게 끝까지 가보고 싶다.


그러기엔 지금은 버스의 르네상스 시대이고, 그덕에 나는 너무 안전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은 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