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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pr 03. 2019

좁은 문

문은 원래 좁다


나는 총 네 개의 문과 같이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실 문을 열고 나가 욕실 문을 열고 잠결에 칫솔을 입에 문다. 씻기를 마치면 옷방 문을 열고 대충 뭔가를 위아래로 걸친 뒤, 현관문을 열고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세상과 조우한다. 바깥에는 두 개의 문이 더 있다. 현관문 옆에 있는 보일러실 문, 그리고 낡은 대문이다. 끼익 소리가 나는 대문을 열고 지하철 역으로 뚜벅뚜벅 바쁘게 걸어간 뒤, 붐비는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발 걸쳤나 싶기 무섭게 "문이 닫힙니다, 문이 닫힙니다." 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미처 타지 못한 사람들은 행여 놓칠세라 닫히는 문 사이로 몸을 바쁘게 밀어 넣는다. 겨우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 건물에 도착하면 엘리베이터를 오래 기다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침내 사무실 앞에 도착해 지문을 찍으면, 유리문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열린다. 후우. 일어나서 출근하기까지 내가 거쳐온 문은 총 열개다.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지 않고 버스를 타게 되면 하나의 문이 더 추가된다.


출근길, 꾸역꾸역 지하철로 몸을 밀어 넣는  사람들을 보며 '문은 왜 이렇게 좁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안 좁은 문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굳이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문은 원래 좁다.


문의 기본 속성은 '연결'일까 '단절'일까.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그 어느 대답도 괜찮다면 나의 선택은 단절이다. 가장 처음에 문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짐승의 위협이나 비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문을 만들었을 거라고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그러니 처음 문의 주인은 약자였다. 시간이 지나 문이 여러 개 생겨나면서, 똑같이 생긴 문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많이 가진 자가 문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힘이 센 자는 아름다운 문을 질투해 빼앗거나, 약한 자들을 동원해 더 크고 견고한 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문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많이 가지고 힘이 센 자, 즉 강한 자가 문의 주인이 되었다. 강한 자는 더욱 크고 더욱 아름답고 더욱 으리으리한 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문 앞을 서성이며 안으로 들어가길 원했지만, 그 문은 강한 자가 허락한 이만 들어갈 수 있었다.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를 다른 이들이 부러워했다. 문은 곧 자격이 되었다.


자격은 곧 제약이다. 문은 공간에 대한 제약일 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제약이기도 하다. 클럽 문 앞에서는 '입뺀(입장뺀찌)'를 당하고,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려면 벽을 향해 눈을 질끈 감고 돌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른들은 늘 말한다.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다고. 바꿔 써본다. 모든 일엔 다 문이 있다.


제약은 곧 권력이다. 내가 드나드는 모든 문은 권력이다. 직장과 안전한 신용등급과 갚을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네 개의 문과 같이 살 자격을 얻는다. 차비와 출근길 지옥철을 거뜬히 견뎌낼 만한 체력이 있어야 지하철에 올라탈 자격을 얻는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적정 수준의 성과를 내야 유리문을 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문의 주인이 요구하는대로 나를 문에 끼워 맞춘다. 문을 박차고 나오기도 하지만, 또 금세 다른 문 앞을 기웃거린다. 인간은 평생 이런저런 문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존재다.



하늘이라고 문이 없을까. 바늘구멍보다 작다는 천국으로 가는 문도 저 하늘에 있다.


하루에 수십 개의 문을 드나들며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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