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꽃반지 Jul 03. 2019

고기와 연애의 질감

콩고기를 먹습니다

콩으로 만든 채식 햄


원래는 칼퇴를 하고 친구와 영화를 볼 계획이었지만, 퇴근이 늦어져 혼자 집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객석에 몸을 푹 파묻고, 광고 몇 편을 흘려보내며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 여름을 맞아 개봉한 공포영화의 섬뜩한 장면이 지나가고, 밝은 씨엠송과 함께 개 사료 광고가 뒤를 이었다. 우리 개에게는 아무거나 안 먹인다, 육분이 아닌 생고기를 먹인다가 포인트였는데 육분이 아닌 생고기... 에서 홀로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책 제목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왜 우리는 개는 '애완' 동물로 분류하고 돼지나 소는 응당 '식용'동물로 분류할까. 먹어도 괜찮은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은 누가 규정짓는 것일까. 집에서 개를 키우면서도 복날이면 밖에서 친구들과 보신탕 한 그릇 하고 돌아온 부모님을 '야만적이다!'라고 비난했으면서, 정작 가족 외식 날이면 상추와 깻잎에 삼겹살을 얹어서 부모님께 내밀던 내 손은 야만적이 아닌가. 막 지나간 공포 영화의 한 장면보다 밝은 씨엠송과 함께 흘러나온 짤막한 이 광고가 어쩌면 더 섬뜩한 게 아닐까. 영화 한 편 보러 갔으면서 거 참 불편하게 사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성실히 고민하고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비건 페스타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내가 쓴 글의 제목은 '채식 : 착취에서 존중으로 향하는 근사한 여정'.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나는 아직 완벽한 비건이 아니며, 무의식적인 착취에서 눈을 돌려 조금씩 존중으로 향하는 길 위에 한 발을 올려놓은 사람이다. 순대가 먹고 싶어서 몇 며칠 머리를 쥐어뜯다가 결국 밤늦게 순대 트럭으로 달려간 적도 있고, 친구가 싸온 도시락에 든 고기를 못 이기는 척하고 먹은 적도 있으며, 치킨이 먹고 싶어서 참고 참다가 '다른 생명체 존중한답시고 나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없는 거냐!' 싶은 생각에 잔뜩 날이 서기도 했다. 괜히 무기력한 날이면 '이게 다 내가 고기를 안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염려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TV에 비건 7년 차라는 한 남성이 출연해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다"라는 말을 했는데, 처음엔 그 모습을 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건식을 저렇게 오래 해도 고기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거구나, 그러면 평생 저렇게 괴로워하며 욕구를 눌러야 하는 걸까. 특히 나는 한 달에 한번, 월경이 다가오면 고기가 미친 듯이 당겼다. 평소에는 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그때만큼은 몸도 허하고 빈혈도 심해서 고기를 챙겨 먹곤 했다. 비건을 시작한 이후에는 월경 기간에도 고기를 먹고 싶은 욕구를 애써 눌렀는데, 뭘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안 먹자니 몸이 힘들고 먹자니 마음이 괴로웠다. 고민 끝에 채식 모임에서 만난 다른 여성들에게 이 기간을 어떻게 넘기느냐고 물어봤는데, 다들 고기에 대한 욕구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고민은 다시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참고 참다가 고기를 먹으면 의외로 그렇게 맛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고기를 먹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무슨 맛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막상 한입 베어 물면 '내가 이걸 왜 그렇게 먹고 싶어 했지?'라는 의문과 동시에 후회가 올라온다. 아, 이왕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을걸 하고. 비건은 이렇게 본능적인 욕구를 억눌러가며 수행자처럼 묵묵히 해나가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을 여전히 품은 채.


지난 주, 월경이 다가오자 단것과 함께 고기가 또 미친 듯이 당겼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욕구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해봤다. 나는 뭘 원하는 거야? '맛'이야? 몸은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아니 '질감'이야. 주변 사람들에게 채식을 한다고 알리면 응당 돌아오는 대답이자, 내가 내심 혐오하고 있었던 그 말.

"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나의 (고기) 씹는 재미를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하는 게 당연하단 말이야?라는 반문이 목 끝까지 차오르던 바로 그 대답. 나의 몸은 '씹는 재미'를 원하고 있었다. 매우 강하고 간절하게. 무르지 않은 두부와 템페 등을 사서 몸이 원하는 식감을 제공하려고 해 봤지만 허사였다. 내 몸은 매우 구체적으로 '고기'를 부르짖었다.


콩고기에 대해서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처음에 고기에 대한 대안으로 콩고기가 나왔을 때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기를 먹고 싶으면서 그 욕구를 누르는 게 위선적이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채식주의자면 고기를 안 먹고 싶어 해야지, 실은 고기를 먹고 싶으면서 겉으로 안 그런 척하는 게 위선적이라는 뜻이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콩고기'를 고기보다 더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할 바엔 그냥 시원하게 고기를 먹지, 왜 겉으로 고상을 떤담.


식재료에 관심이 많아 콩고기를 몇 차례 구매해본 적도 있지만, 순전히 호기심이었고 결론은 '오, 생각보다 맛있네.'로 끝났다. 그런 내가 몇 년 만에 콩고기를 다시 구매했다. 이번에는 내 몸을 위한 적극적인 솔루션이다. 고기를 씹고 싶은 나를 인정하면서 학대하지 않는 방법. 나는 라면을 먹지 않은지 7년쯤 되는데 캠핑이나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먹고 있으면, 나도 당연히 먹고 싶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어떻게 라면을 안 먹고 싶지?'라고 의아해하지만, 저도 먹고 싶습니다. 여러분. 좀 더 나에게 좋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콩고기에 꽃말(?)을 붙여보자면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 대한 고백' 아닐까. 왜 고기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했을까? 채식주의자는 정신부터 완벽하게 세팅되어야 한다고, 고기를 먹고 싶어 해서는 안되며 그런 생각조차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스스로를 학대했을까. 어쩌다 고기를 먹는 나에 대해서는 더했고.


고기를 먹든 안 먹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당신이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다른 생명을 해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섣부른 라벨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100명의 사람에겐 100개의 일상이 있으니까. 다만 어떤 삶을 살든, 어떤 가치관을 갖든 그 여정이 나를 학대하고 힐난하는 과정이 아니었으면 한다. 내가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을 결심하며 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그 결정 자체로 충분히 나를 응원하고 인정해줄 만하다.


올라오는 욕구를 두더지 뿅망치 누르듯 보이는 족족 내칠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어떻게 안고 살아갈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진짜 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할 힘도 얻을 수 있으니까.


연애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올봄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는데, 그 공백을 빨리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고 급급했던 것 같다. 사람, 취미, 일 무엇이든. 마음의 헛헛함과 슬픔, 그리움과 같은 감정을 '구질구질하다'라고 규정짓고는 나를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고기를 먹고 싶은 나의 욕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몸이 '씹는 재미'라고 수줍게 고백해오듯, 텅 빈 공간을 무언가로 재빨리 채우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손을 잡아주는 따듯한 누군가의 손길'이라고 이야기힌다. 사랑받고 싶었구나, 나란 사람. 그저 그게 다였구나.


우리나라에선 표백제에 쓰이는 '表白'이라는 말이 중국에서는 '마음을 낱낱이 고백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좋아하는 이에게 속마음을 고백할 때도 '표백한다'라고 말한다. 콩고기 앞에서 나는 내 마음을 좀 더 표백하기로, 좀 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표백제에 마음을 푹 담근 것처럼, 콩고기 한 점에 마음이 환해진다.

꽃반지 소속 직업에세이스트
구독자 532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