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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l 18. 2019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

라이온 킹은 어디에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하기 싫고 도대체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과연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으면서도, 회사에서는 그 모든 걸 해내야 하고 해낼 수밖에 없고 늘 그렇듯이 해내고야 만다는 것을. 가방도 채 내려놓기 전에 파티션 너머로 팀장이 "오늘 업무는..." 하고 아침인사와 퉁치며 줄줄 읊어주는 To Do List, 고픈 배를 움켜쥐고 모니터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점심시간과 (어찌 됐건 오늘이 끝났다는) 안도와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다가오리라는) 무력을 담은 가벼운 한숨이 공기 중에 흝어지는 퇴근길.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한편으나를 벼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출근하지 않은지 오늘로 꼭 나흘째인데, 칼날이 무뎌진 것은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지난, 아니 2주 전부터 붙들고 있던 글을 아침에 다시 붙들었으나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이리 짜깁고 저리 짜깁고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끙끙거리다 "30분 동안 안 써지면 쓰지 마세요."라고 말했던 소설가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문장은 속도감이라고 했던가. 회사에서 '글 쓰는 노동자 1'로 살 때는 속도감을 강제 장착할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메신저 알림창에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 소리들.

"이거 1시간 이내로 돼요?" "이거 좀 봐주세요." "이거 급한 건데 점심 식사 조금만 미루죠." 온통 급한 일 투성이. 회사에서 급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은 퇴근뿐이지. 아, 물론 고용주 입장에서. 나를 날카롭게 갈아대던 속도감에서 툭, 떨어져 나오고 나니 급속도로 무뎌진다. 어쩌면 그냥 나는 본래 무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20년 차 기타리스트인 선생님도 "사흘만 기타를 손에서 놓아도 손가락이 무뎌져서, 여행을 갈 때는 조그만 기타라도 꼭 챙겨간다"라는 말을 했는데, 사흘을 넘겨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나니 뭐라도 써야 할 판이라 이 글을 쓴다. 내일이 되면 단 한 줄도 못 쓸 것 같다.



실사, 사실, 실사, 사실


아침 7시 45분, 친구들과 조조를 보러 갔다. <라이온 킹> 개봉일이기도 했지만, 허둥지둥 지하철 역을 향해 달려갈 그 시간에 사람 적은 영화관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실사영화라고 했다. 실사는 사실인가? 실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실로 있는 일'이라는 풀이가 나오고 사실은 '실제로 있는 일'이라고 하니 이게 뭔 말장난인가 싶하염없는 끝말잇기를 할 때 단골 소재인 수박, 박수, 수박, 박수... 를 잠깐 떠올렸다. 모든 동물을 CG로 처리한 라이온 킹은 정말 사실 같았다. 실제 동물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 털 끝에 달린 물방울이나 모래에 찍히는 발자국, 벌레의 작은 날갯짓까지 모든 게 완벽한 실사영화. 우와, 진짜 같다! 그런데 그게 전부.


창간 4주년 기념호인 올여름의 <Axt>에 실린 문장을 잠깐 빌려보자.

때로 문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서사'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서사', 즉 영화, 드라마, 심지어 유튜브의 개인방송, 브이로그, 예능 등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서사-이야기'인가? (중략) 단지 더 이상 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성'자체가 더 이상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한줄평

서사를 거부하는 이 시대. 라이온 킹 역시 시대 흐름에 맞춰 서사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25년 전 그 영화에 컨트롤 씨 + 컨트롤 브이를 완벽하게 잘했다. 개봉일에 맞춰 친구들과 라이온 킹을 보고 온 어머니도 원작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화관에 가서 자막을 못 읽는 남동생에게 자막을 읽어주며 영화를 보던 순간과 스카가 절벽에서 무파사를 발톱으로 찍어 죽이는 장면은 25년이 지나도록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어제 아침에 본 선도 100%의 영화는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에.



그 너머


서사는 곧 그 너머의 세계다.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그 껍질을 뚫고 심연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서사의 세계는 번거롭고 귀찮지. 미친 속도에 올라탄 이 시대에 언제 시간을 내어 그 안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책 한 권 내겠다는 꿈을 가진 내게 "요새 누가 책을 읽어?" 하고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집에서 쌀을 불려 밥을 짓는다는 내게 "사 먹는 게 더 싸요."하고 누군가는 숫자를 갖다 대지. 그들 말이 맞다. 이 시대는 서사를 거부하니까. 이야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회사에서 늘 듣는 "열심히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잘하는 게 중요하지." 이 말은 곧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야?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로 치환된다.


어제 영화를 보고 나와서 잠깐 자전거를 탔다. 버스를 타러가다 가로수와 함께 내겐 늘 거리의 장식품이었던 따릉이가 눈에 들어왔다. 몇 년 동안 타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왜 비로소 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오랜만의 자전거라 영 엉거주춤이다. 하늘은, 소설가 박상영의 표현을 빌리면(언젠가는 갚을 날 오기를) '누군가 실수로 물을 쏟아버린 우글우글한 도화지'같았고 맨살에 엉기는 공기는 습하고 축축했다. 나를 앞선 두 대의 자전거를 보며 천천히 달렸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을까 염려되었는지, 가끔 앞서 달리던 친구들이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았다. 라이온킹보다 훨씬 즐거웠다. 


그저께는 결혼한 친구의 신혼집에 가서 그 동네를 오래 걸었다. 긴 하천이 있었고, 여름답게 하천 가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친구가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보라색도, 노란색도, 하얀색도 볼 때마다 너무 예뻐서 화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친구의 말을 듣고 그제야 뭉뚱그려보던 보라색과 노란색과 하얀색을 바라보았다. 친구는 내게 "마음이 건강한 게 제일 좋은 거야."하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갑자기 옆길로 새자면, 내가 나고 자란 고향에는 '너머'라는 분식집 브랜드가 있었다. 뭐든 다 맛있었는데 특히 여름에 파는 왕빙수가 환상적이었다. 서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아무도 몰랐고, 지금은 각종 프랜차이즈에 밀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만 나는 종종 너머 생각을 한다. 너머 왕빙수가 그리운 줄 알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왕빙수를 먹으면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리운 거였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토록 수없이 너머 왕빙수를 먹었으면서. 친구들의 손을 잡고 '너머'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커다란 왕빙수를 한 숟갈씩 사이좋게 나눠먹을 때마다, 나의 고민과 속마음을 조금씩 꺼내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너머로 가고 있었겠지.  


나는 너머 왕빙수를 그리워하며, 그 너머의 세계로 갈 것이다. 마침 책장을 살펴보니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우리의 세계는 문학으로 넓어질 수 있다>와 같은 제목이 보인다. 이들은 일찌감치 이야기를 타고 국경을 넘고 세계를 넓힐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군. 25년 전 뭉툭한 라이온 킹은 재개봉 안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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