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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4. 2019

#18.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냉이


'정갈하게 다듬어 깨끗이 씻는다'

'뿌리 부분의 흙과 마른 떡잎을 잘 다듬어야 한다'

'깨끗하게 손질하여 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어준다'


스님 세 분의 레시피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스님들이 입을 모아 '깨끗이 다듬어 씻을 것'을 강조하는 주인공은 바로 냉이(이 드러운 녀석!). 냉이의 쌉싸름한 향기와 맛은 응용할 요리가 무궁무진다. 튀겨서 강정해 먹어도 좋고, 만두로 빚어도 좋고, 전으로 부쳐도 맛있고, 조물조물 밑간 해서 김밥에 넣어도 별미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지만, 냉이 요리를 배우는 날엔 먹을 생각보눈 앞에 산처럼 쌓여있을 냉이를 다듬을 생각에 한숨부터 푹 나온다. 키를 높여 자라는 여느 풀과는 달리, 냉이는 땅에 납작 엎드려 추운 겨울을 나기에 유난히 흙이 많이 묻어있다. 씻어도 씻어도 흙물이 계속 나오고, 말라붙어있는 누런 잎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손으로 일일이 떼내야 한다. 수북한 냉이 한 바구니를 놓고 손질하다 보면, 도대체 이걸 먹겠다고 나선 최초의 인류는 누구인지 궁금해진다(찾아가서 따질 건 아니지만).


그날도 심각한 표정으로 냉이와 씨름하고 있었다. 냉이 뿌리에 붙은 흙덩이처럼 엉킨 내 마음을 들켰는지 스님이 입을 여셨다. "요리는 재료 손질이 반이에요. 귀찮아도 재료 손질을 잘해놓으면 백배는 맛있어요. 진짜 딱 백배." 어느새 손톱 밑에 새카맣게 낀 흙을 보면서 '백배까진 안 맛있어도 되는데...'하고 조용히 푸념했다.



과정에 흥미가 없으세요?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이렇게까지 꼼꼼해야 되나 싶어 한숨부터 푹 나오는 일이 내겐 냉이 다듬기 말고 또 하나 있다. 바로 기타 연주. 멋있는 곡 하나 치면서 폼 잡고 싶어 시작한 건데, 멋있는 곡은 도대체 언제 치나 싶게 진도가 더뎠다. 매주 음 하나하나를 겨우 뜯었다. '이렇게 손가락만 더듬거리다가 언제 제대로 된 곡 연주하나.' 싶은 생각뿐이었다(물론 연습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내 마음이 담긴 손가락에선 늘 '띠용'하는 경박한 소리가 났고(기타에서 이런 소리가?), 선생님이 수차례 지적해도 구부러진 엄지는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낙엽이 발끝에 사그락사그락 밟힐 때 기타를 시작했는데, 어째서 반년이 지나 봄이 오도록 기타 위의 손가락은 아직 이리도 부끄럽단 말이더냐. 오호라 통제라. 고민을 거듭하다 선생님께 수줍은 내 마음을 전했다. "선생님... 저 기타에 흥미를 잃었나 봐요." 나의 고백에도 선생님은 별 말없이 수업을 이어나갔다.


몇 주 뒤,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이 갑자기 물었다.

"여전히 기타에 흥미가 없으세요?"

한번 집 나간 흥미가 쉽게 돌아오지 않던 참이었다. 잠깐의 침묵에 창밖의 빗소리가 엉겼다.

"음... 선생님, 요리를 배울 땐 얼른 뭐라도 만들어서 먹어보고 싶잖아요. 아직도 음 하나하나를 배우니까 주방 구석에서 주야장천 파만 썰고 있는 기분이에요. 빨리 정성하 곡도 치고 싶고, 코코 주제가도 치고 싶은데..."

선생님이 조용히 답했다.

"물론 코드 외워서 곡 카피하면 실력이야 빨리 늘겠죠. 그런데 그 곡만 카피 잘하면 뭐해요, 악보를 못 보는데. 기타는 코드 짚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어떤 정서로, 어떻게 터치하고, 어떤 톤을 만들 건가... 게 음악이에요."

한 음 한음을 '제대로' 칠 줄 알아야 그게 음악이라는 선생님의 대답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소리만 가득했다.



내가 냉알못이라니!


기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살 것도 없으면서 싱숭한 마음에 괜히 근처의 시장에 들렀다. 봄나물이 지천이었다. 그래도 수업에서 냉이며 쑥이며 좀 다듬어봤다고, 할머니들이 쭈그리고 앉아 내다 파는 나물들이 뭔지 다 알 것 같았다. 마치 막 글을 배운 아이가 신이 나서 거리의 간판을 쉴 새 없이 읽는 것처럼, 나도 시장의 나물들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게다가 이젠 냉이 다듬는 요령도 어느 정도 생겼고.

"할머니, 이거 하나 주세요."

나 이제 냉이 요리도 하는 여자야! 망설임 없이 냉이를 한 봉지 샀다. 집에 돌아와 냉이를 펼쳤더니 익숙한 그 향이 안 났다. 신선하지 않은 건가? 냉이 사진을 SNS에 올리며 '냉이에서 왜 향이 별로 안나지?'라고 썼더니 댓글이 달렸다.

"그건 달래인 거 같은데요."

봄철 내내 냉이를 몇 소쿠리나 다듬었으면서, 냉이랑 달래랑 구분도 못하는 냉알못('냉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줄임말)이라니. 허! 결과보단 과정이라고, 과정을 충실히 음미하는 사람이 되자고 줄곧 되뇌면서도, 내 눈은 늘 저 멀리 목적지만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바로 앞의 한 걸음부터 제대로 봐야 하는데, 헐렁한 마음을 다 들켰다.


"냉이 뿌리 잘 다듬으면 뭐해요. 냉이 생긴 것도 모르는데. 요리는 불 앞에서 볶고 튀기고 하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어떤 재료를, 어떻게 다듬고, 어떤 특성을 끌어낼 건가... 게 요리예요."

갑자기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지. 다가올 봄에도 열심히 냉이를 다듬어야겠다. 눈을 부릅뜨고 냉이의 눈코입을 다 살펴보면서. 물론 기타도 열심히 치면서...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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