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죽상 (2)

빠워 오브 아시아

by 꽃반지


이쯤되니 온통 머릿속에는 온통 매홍손 뿐이다. 매홍손 가려고 들떴던 지난밤 열한시부터 심장 철렁하며 일어난 새벽 네시. 그리고 이어진 작은 소동까지... 모든 것을 끝나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두시가 넘었다. 빠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더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빠이의 정취를 제대로 즐기려면 스쿠터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야하는데, 스쿠터를 탈 줄 모르는 나는 기껏해야 눈익은 골목을 왔다갔다 거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새벽이면 아줌마를 찾아 죽을 먹고, 저녁이면 야시장에 나가 친구들을 사귀었다.


IMG_20150211_225403.jpg 빠이에서 직접만든 공예품을 파는 민(왼쪽)과 민의 이모. 헤어질 때 나에게 직접 그린 엽서를 선물해주었다. 보고싶은 친구.


그렇지만 텅 빈 낮 시간에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매일 새벽까지 진탕마시는 유럽인들은 낮에야 부스스 일어나 기타를 치거나 책을 읽었다. 그 얄미운 다니엘은 '네 이름이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너무 웃겨.' 가끔 날 놀려댔다. 하루는 스쿠터를 못 타는게 억울해 자전거라도 대여해 끌고 외곽으로 나가려는 눈물겨운 시도가 있었지만, 정말 눈물겹게 네시간 만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IMG_20150211_170742.jpg 자전거를 타고 빠이 외곽으로 나가보려는 눈부신 시도가 있었다. 불쌍하게도!


내일이라도 짐을 꾸려 빠이를 떠날까... 귀국날짜는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까웠다. 여기까지 와서 매홍손을 못가본다는게 억울했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 짐을 싸서 내일 떠나야하나 어쩌나... 발끝만 바라보며 골목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숙소에서 두밤을 함께 자고, 유럽인 등쌀에 다른 곳으로 옮긴 타이완 소녀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아..." 그녀에게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녀는 나를 위로했다. "네가 스쿠터라도 탈 수 있으면 스쿠터를 타고 가보라고 할텐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녀는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새로 묵게 된 숙소에 일본인 친구들이 새로 왔다고 했다. "그래, 저녁에 봐." 그리고 그날의 저녁식사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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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_1593832304182759.jpeg 빠워 오브 아시아! 한국, 일본, 타이완, 중국인이 모였다.


저녁이 되어 타이완 소녀는 세명의 뉴페이스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두 명은 일본인, 한 명은 중국인이었다. 우리들 사이에 중국어와 영어와 일어가 마구 뒤섞였다. (나는 다행히 중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알고, 타이완 소녀는 중국어와 일어를 할 줄 알며, 일본인들은 일본어를 잘했다.)


빠이에서 만난 아시아 대륙의 친구들. 나름 이것도 인연이라며 자축하는데, 일본에서 온 남자애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나 내일 매홍손에 갈꺼야."

"뭐!!!!!! 어떻게?"

"오토바이 타고. 나 빠이까지 오토바이 타고 왔거든."


이것은 정녕 신이 보낸 매홍손의 사신 아니겠는가. 나는 입에 있는 밥풀을 다 뱉어낼 정도로 광분하며 벌떡 일어났다.

"혹시 그 오토바이에 한 사람 더 타도 되니?"

"그럼! 너도 갈래?"


오늘 있었던 한바탕의 소동은 모두 신이 나를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였구나! 나는 기쁨의 눈물콧물을 흘리며 어쩔줄 몰랐다. 내가 너무나 기뻐하자 나머지 친구들도 궁금증이 일었나보다.

"지현, 매홍손이 그렇게 좋은 곳이야?"

"응! 나 정말 가보고 싶어. 거기가면 롱넥족도 있대."

"그래? 그럼 우리 모두 다 같이 가자."


와, 순식간에 매홍손 원정대가 꾸려졌다. 만약 오늘 새벽 예정대로 새벽 세시 반에 출발하는 빵차에 몸을 실었다면, 아마 저녁때쯤 구겨진 빵이 되어 돌아왔을텐데 친구들과 간다면 너무 재밌을 것 같았다. 나와 일본인 소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스쿠터를 몰 줄 알아서, 나는 타이완 소녀의 뒤에 타고 나머지 친구들은 각자 한대씩 몰기로 했다.


"그럼 내일 아침 여덟시에 여기서 보자!"

숙소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흥분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매홍손에 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과, 너무나 묘하고 감사하게도 매홍손에 가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다같이 스쿠터를 타고 어딘지 모를 저 먼 곳으로 떠나게 됐다는 것도. 또다시 늦잠을 잘까봐 알람을 스무개나 맞춰두었다. 긴장해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번쩍 눈을 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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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_104415.jpg 일본인 친구 둘. 지금이야 말할 수 있지만 그 때 아키군한테 좀 반해있었다. 그 뒷자리는 내 것이어야 했어!!


어제와는 사뭇 다른 아침이다. 친구들과 스쿠터를 빌려 떠날 채비를 가뿐하게 마쳤다. 나는 이미 광분상태. '매홍손에 갈 수 있게 됐다니!' 타이완 소녀의 뒷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감싸쥐었다. 출발!


20150213_223041.jpg 빠워 오브 아시아. 쌍팔년도 청춘물 같은 느낌.


매홍손은 태국 북부의 끄트머리에 있다. 각자의 스쿠터에 몸을 싣고 태국의 맨 끝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 빠이에 들어오는 길과 마찬가지로 매홍손으로 향하는 길도 끝없는 커브의 연속, 대략 천 여개의 커브를 돌아야 한다. 빵차에 실려 커브를 도는 것과 스쿠터를 타고 온몸으로 커브를 만끽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커브를 돌때마다 잔뜩 긴장해 나도 모르게 타이완 소녀의 배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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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_150106.jpg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매홍손으로 가자!


가는 길에 사계절을 한꺼번에 만났다. 봄의 연보라가 활짝 피어있다가도 금세 풍경이 뒤바뀌어 마른 낙엽이 뒹굴고, 다시 어린 여름의 초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스쿨버스에 몸을 실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고, 문득 길에서 코끼리를 마주쳐 서로의 눈부처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사본 -2015-02-14 07.55.29.jpg 살면서 코끼리를 이렇게 가까이 보게 될줄이야!


얼마를 갔을까. 아침 여덟시에 출발했는데 이미 정오를 훌쩍 넘겼다. 가는 중간중간 길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림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몇 시간을 더 가야할까, 갈 수는 있는걸까. 우리끼리 고민에 빠져있는데 '못간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아저씨가 다가와 다시 묻는다. 중국어와 영어와 일어로 떠드는 우리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너희 어느 나라에서 왔니?"

"일본, 타이완, 중국, 한국이요!"

"어떻게 이렇게 만났느냐? 너희 응원 하마!"


이미 절반정도는 왔기 때문에 되돌아 가더라도 몇 시간은 걸릴꺼다,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가보고 위험하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가 우리의 결정.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가보자. '칼을 뺐으면 무라도 썰어야한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었으나 영어로도, 중국어로도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매홍손에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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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홍손도 매스컴을 많이 탔는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깡촌의 고즈넉한 풍광과는 조금 달랐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어글리 코리안의 저력을 발휘해 디스카운트를 해달라고 나섰다.

"아시아 대륙에서 한꺼번에 왔는데 싸게 해주세요!"


사본 -20150213_160221.jpg 세계 어느나라나 아이들은 대야에 들어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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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을 위해 직접 목에 끼워볼 수 있는 고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을에서 예쁜 아줌마에게 붙어 기념사진을 한장씩 찍었다.

"하루종일 목에 끼고 있으면 안 아프세요?"

"(귓속말로) 손님들 가고 나면 빼요."


매홍손은 10여분도 채 안걸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는 목에 차는 고리와 같은 재질로 만들었다는 팔찌를 하나씩 사서 나눠꼈다. 빠이로 돌아가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해서 다시 바삐 길을 나섰다.

사본 -2015-02-14 00.41.29.png 둘이 너무 다정해서 뒤에서 훼방을 놓았다. 진정한 어글리 코리안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중!


최대한 속도를 내봤지만 해가 똑 떨어지자마자 산 속의 어둠은 다급하게 내렸다. 금세 우리는 깊은 산 속의 어둠에 휩싸였고, 빠이까지 가려면 아직 몇 백 여개의 커브를 남겨둔 상태. 밤이 짙어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져 길 위엔 급기야 얼음이 엉기기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역력하다. 지독한 검정을 가르는 건 오직 빨간 불빛 세 개뿐. 산 속의 공기가 너무나 차가워,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달리는 타이완 소녀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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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게도) 그녀는 운전을 하느라 잔뜩 긴장해 밤하늘을 볼 여력이 없었겠지만, 그녀를 꼭 붙든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그 많은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별이 너무나 많아서 어깨 위로 와장창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의 무게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고 여겨질 정도로. (컴컴한 산길을 가르는 스쿠터의 속력과 서로의 거리 때문에, 그리고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누구 하나 '우리 잠시 멈춰서 별을 보자!' 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빠이에 도착하고 나서 다들 너무나 아쉬워했다. 잠시 멈춰서 별을 보지 못한 것을.)


하늘 한편에는 오리온자리가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굽이치는 산길 위에서 내 머리 위의 별들도 함께 굽이쳤다. 나는 연이은 커브에 어지러워 멀미가 나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리온의 허리춤에 나란한 별 세 개가 마치 우리와 꼭 같아서 빙긋 웃었다. 이웃한 저 별 셋도 실은 서로 아주아주 많이 떨어져 있댔다. 1초에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돈다는 빛의 속도로도 600년을 꼬박 달려야 한다지. 별들이 누군가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리온자리’ 로 한데 묶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지 않을까. 어쩌면 일생에 단 한번 마주할 일 없는 얼굴들이 생의 잠깐 동안 한데 모여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흐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베스트가 어떤 순간일지 모르겠지만, 이 때를 평생 결코 잊지 못할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한없이 아름다웠다. 어떤 말로도 담아내지 못할만큼.






“지현! 나 문득 여행의 진짜 의미를 알겠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소중한 순간을 나누고 서로를 오래 기억하는 것. 이게 진짜 여행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어. 너희와 함께한 그 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반짝이고 아름다운 순간이야.”



한국으로 돌아와 여행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던 어느 밤, 함께 여행했던 친구 중 하나가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다른 곳을 여행하고 있지만 그 날만큼 아름답고 벅차진 않다고, 우리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목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면서, 우리들의 어깨 위로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던 그 밤의 별들을 떠올렸다. 너무 아름답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감정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섭게 끌어안았다.


꼭 다시 만나서 함께 별을 보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그러자고 거듭거듭 약속을 했지만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삶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쉬이 휘발되며, 지키고 싶은 약속일수록 지키지 못하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멀리서라도 서로의 반짝임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좌표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꽤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태국을 다녀온 이후로 나와 당신 사이를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수많고 수많은 우리들의 만남은 모든 순간이 완벽하게 맞물려야 일어나는 기적같은 거라고. 모든 순간은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분명히 있는거라고. 나를 매홍손에, 그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가게한 새벽의 죽 한그릇처럼 말이다. 새벽의 죽 한그릇을 둘러싼 무수한 인연들 말이다.


밤하늘의 한구석을 밝히는 별들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한구석을 살그머니 밝히는 중일 게다. 누군가는 나의 불빛을 보고 내게 기대고, 나 역시 누군가의 불빛에 나를 기댄다. 혼자가 아니구나. 이 무섭도록 드넓고 깜깜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는구나. 서로가 서로를 기대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별처럼 반짝인다.


나와 내 삶에 등장하는 누군가들 사이에는 얼마큼의 시간과 공간과 우연과 인연이 깃들어 있는 걸까.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상관을 가늠해보진 않지만 이따금 밤하늘을 들여다본다. 우리들이 만나는 일. 시간과 공간과 우연과 인연의 귀퉁이가 맞닿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일. 그래서 우주가 하는 일.


(+) 나의 삶에서 만난, 그리고 만나게 될 모든 별들의 좌표에 감사하며. 그립고 보고픈 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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