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죽상 (1)

굿바이, 빠이

by 꽃반지



"헤이! 깨워준다고 했잖아!!!"

"오, 쏘리. 노 프라블럼!"

선득한 느낌에 번쩍 눈을 떴더니 새벽 네시. 빅 프라블럼이다. 노 프라블럼이라고 태평하게 말한 후, 다니엘은 아랫층 침대로 쏙 기어들어가버렸다. 젠장! 여기는 태국의 빠이이고, 난 유럽인들이 득시글한 게스트 하우스에 홀로 머무르고 있는 동양여자다. 빠이로 올 계획은 전혀 없었다. 빠이로 오기 전까지 빠이라는 곳이 있는줄도 몰랐으니까.


<온 더 로드>라는 책 한권을 읽고 10년도 넘게 방콕 카오산 로드에 대한 로망을 품어왔었다.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라고 불린다는 그 곳. 레게머리와 갓 짜낸 과일주스가 길바닥에 자유와 함께 막 뒹굴고 있을 것 같은 그 곳. 왜 카오산 로드에 팍 꽂혔는지는 모르겠다. 마음 한편으론 아주 어릴적부터 세계일주를 꿈꿨었는데, 어쩌다보니 훌쩍 떠나기엔 애매한 어른이 되었고 '배낭여행자들의 성자'가 되기엔 요원해보이니 '성지'에라도 발을 디밀고 싶은 속셈이었는지도.


카오산은 좋았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달랑 티켓과 환전한 돈만 들고 비행기를 탄 덕분에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관광책에서 하지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니며 - 한국에 무사 귀국해 '아, 나 여기도 다녀왔었는데!' 하며 회상에 젖었다가,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이라는 걸 알았다. 예를 들면 길가에서 누가주는 음식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든가. - 도착한 첫날밤 '납치녀' 소동까지 떠들썩하게 벌이지 않았던가. (현지인들에게 한인 게스트하우스 위치를 물었다가 오토바이를 덥석 얻어탔다. 내려달라는 말을 했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현지인 아저씨는 나를 태우고 자꾸 한인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다녔고 나는 급기야 예약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납치됐다'며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냈던... 머무르는 3일동안 내 별명은 '납치녀'였다.)


캐리어는 끌어안고 배낭은 등에 메고. 방콕에 도착한 첫날, 기꺼이 나를 태워 숙소를 함께 찾아준 방콕 아저씨. 카쿤캅!


처음 맛보는 방콕의 떠들썩함이 좋았지만, 며칠지나니 관광지말고 좀 더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식당, 길거리, 시장... 어디든 마주치는 한국인들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고. 그 때 누군가로부터 '빠이가 좋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그길로 짐을 꾸려 빠이로 왔다. 악명높은 그 공포의 천여개 커브길에서 미슥거리는 속을 틀어막으면서 말이다.


빠이에 저녁이 내리면 하나둘 불이 켜진다.


빠이는 태국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깊은 산골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려면 두시간 동안 천여개의 커브를 거쳐야 하는데, 그 길이 만만치 않아 악명이 높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게 빵차에 몸을 실었다가, 뒷자리에서 토하는 중국인들의 구토 냄새를 맡으며 입을 틀어막아야했다. 방콕의 떠들썩함을 뒤로하고 산골의 고즈넉함과 빠이 특유의 예술적 분위기를 기대하며 왔지만, 이미 빠이도 많이 변질이 되어있었다. 10년전 책에서 봤던 카오산 로드가 그 카오산 로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내가 잡은 게스트하우스에는 온통 유럽인 뿐이었는데 새벽 세네시까지 시끄럽게 굴며 술을 마시고 우당탕 하는 바람에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와 같은 방에 머무르던 타이완 소녀도 유럽인들 등쌀에 이틀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나는 며칠치 방세를 한꺼번에 다 지불했기 때문에 옮길 수도 없었고.



내가 빠이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죽상'이었다. 새벽 세네시까지 떠들던 유럽인들이 겨우 잠들었을 새벽 무렵, 동이 터오는 작은 골목을 디디며 죽을 사먹었다. 새벽에는 추웠기 때문에 아줌마가 난로를 쬐다가 내가 오면 난로를 내어주었다. 새벽이면 아직 손님들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아줌마와 나는 함께 걸터앉아 구운 빵을 설탕에 찍어먹으며 아침이 오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빅 프러블럼의 그날 새벽, 나는 숙소를 나와 터질듯한 가슴을 끌어안고 죽상인 채로 죽상 앞에 걸터앉았다. 전날 밤 열한시에 어렵게 어렵게 구한 티켓을 자느라고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태국 지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더 깊이 위쪽으로 들어가면 '매홍손'이라는 마을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긴 목에 고리를 챙챙 차고 있는, 그 긴 목의 주인공들이 살고있는 마을이랬다. 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놓칠 수 없다 싶어 마을의 관광여행사를 다 뒤져 '매홍손'가는 차를 물어보았다. 매홍손에 가려는 관광객이 없기 때문에 운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잔뜩 듣고, 풀죽어 숙소로 향하는 내 등뒤에 구원의 손길이 있었으니. "내일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날 수 있느냐? 마침 출발하는 차가 있다!" "오케이, 오케이!"


세벽 세 시 반 출발.

어떻게 구한 차인데 싶어 일찍 잠들려 했으나 (그래봤자 세시간 잘 수 있겠지만) 유럽인들이 그날도 어김없이 떠드는 통에 좀처럼 잘 수가 없었다. 몇 시까지 마실꺼냐, 나 일찍 일어나야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항상 웃는 낯이었던 영국의 다니엘이 '걱정말라, 새벽 세시까지 놀꺼니까 깨워주겠다' 라고 했다. 나는 영국 신사에게 몇번이나 다짐에 다짐을 받고는 겨우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니 새벽 네 시 였던거다. 다니엘은 '노느라 잊어버렸다, 큰 돈도 아닌데 뭐 어떠냐' 말하고는 이미 잠에 빠져버렸다. 와... 신사의 나라에서 왔다며!! 날린 돈도 돈이겠지만, 매홍손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절망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커먼 새벽 속을 터덜터덜 걸어 죽상을 마주하고 앉아있는데, 아줌마가 손짓 발짓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더니 괜찮을꺼라며 날 토닥토닥 해주었다.


강아지야, 너는 내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느냐. 멍멍. (태국개는 어떻게 짖니?)


하도 울상이었던지, 맞은편에 죽을 받아들고 걸터앉은 아저씨가 영어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다. 나는 자느라고 티켓을 날렸다, 아까워죽겠다, 환불받고 싶은데 누군지도 모른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도시 생활을 오래한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결고리 말이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도 클럽에서 자주 부르짖는 '너와 나의 연결고리'. 아저씨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아줌마 한 명을 데려왔고, 나는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 그냥 대머리를 그린게 다다 - 'He no pick me up!'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날밤 열한시, '세시 반에 출발한다, 숙소 앞에 데리러가겠다'는 말에만 의지해 돈을 다 줘버린데다, 어두워서 그 목소리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왠걸. 내 그림을 본 아줌마는 갑자기 또 어디론가 가서 누군가를 데려왔다. 어랍쇼, 판이 커진다?


제일 왼쪽에 빨간 옷 입은 아저씨. 여행사 전체를 통괄하고 있다고 했다. 두둥!


사람들의 슬슬 모여들었다. '폴리스'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맙소사, 내가 잔다고 놓친건데 이거 어쩌지? 빨간 점퍼를 입고 등장한 남자는 빠이에서 제일 가는 스마트함을 장착하고는 유창한 영어로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어디에서 표를 구했나'

'데리러 오지 않은 것이 확실하냐'

'숙소 주소를 확실히 알려주었느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잤는데, 자고 있으면 깨워줘야 할 것 아닙니까?' 라는 어글리 코리안의 면모를 발휘하면서, '어쨌든 깨워주는 소리도 못 들었으니 절반이라도 환불해달라'는 항의를 했다. 아, 이게 몇년만에 나온 해외여행인데 하루를 온전히 티켓구매 환불절차를, 참 뻑적지근하게 밟고 있구나 싶은 씁쓸함도 밀려온다. 오늘따라 쓸개즙이 쓰구나.


빠이 최고의 스마트 가이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미 판이 커질대로 커져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함께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앞에 섰다. 아마 빠이 모든 여행사를 아우리는 여행계의 대물인 것 같았다. 대물에게 스마트 가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 같았고, 대물은 코웃음을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개, 개작두를 대령하라!" 어렸을 때 <판관 포청천>에서 본 명장면이 떠올랐다. 포청천은 죄인에게 "그것이 사실이냐!" 를 묻고, 죄인이 (당연히) 거짓말을 하면 증거 자료를 제시한 뒤, 죄인의 벼슬에 따라 작두 레벨을 달리하여 목을 댕강 쳐버린다. 어쨌거나 늦잠을 잔 건 나니까, 아저씨가 나를 데리러 왔는지 데리러 오지 않았는지는 알 턱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대물이 물었다.

"그 사람은 너를 데리러 갔는데, 네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자고 있는데 왜 안 깨워줍니까? 깨우는 소리 못 들었수다 (뻔뻔)"

"얼마를 환불받기 원하느냐."

"올 오브 잇!" (이 한문장 만큼은 완벽한 영어였다.)

"NO!!"


그 때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뭐라고 외쳤고, 대물은 움찔하더니 나에게 돈을 다 돌려주며 빨리 가버리라는 손짓을 했다.


아줌마, 고마워요!


한바탕 실갱이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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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이 최고의 스마트 가이에게 감사하다 말하며 국수라도 대접하려 했으나, 그는 잘 끝나서 다행이라며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곤 사라졌다. 치명적인 스마트함. 나는 나를 도와준 여러 여행사 관계자분들과 국수를 말며, 오전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나저나 매홍손엔 정말로 갈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다른 차를 구해볼 요량이었는데, 아침에 그 난리가 벌어진 통에 빠이 거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죽상 앞에 앉아있노라면 '헤이, 매홍손!' 이라며 알은 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콕 납치녀에 이어 빠이 매홍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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