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마음

by 꽃반지



나는 여름의 안녕한 결과.

시간의 오랜 혼잣말.

누군가 흘린 색색의 땀방울.

대기의 동그마한 눈동자.

입에 품는 계절.

한 해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달콤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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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두운 밑바닥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문득 아뜩하다. 누군가 내 안에 불을 놓은 것 같다. 세상에 나온다는 건 이런 느낌인걸까. 나른하고 저릿한 이 느낌을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내 안으로 햇살들이 마구 들이친다. 나의 몸 구석구석을 후빈다. 나를 마구 헤집는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햇살들을 꽉 붙들었다. 그러라고 누가 일러준 것도 아닌데 온몸으로 붙들었다.

내 안의 햇살들이 끓어오른다. 보드랍게 끓어오르는 햇살을 따라 바람이 나를 디밀고 들어온다. 바람이 힘껏 나를 밀어낸다. 바람을 껴안았다. 바람을 타고 나도 힘껏 나를 밀어낸다. 나를 넓혀간다. 나의 가장 멀리로. 멀리의 저 너머로. 마침내 나의 바다로.

햇살과 바람을 끌어안은 나는 자꾸만 부풀어 오른다. 동그란 햇살과 동그란 바람이 내 안에 가득해 나는 자꾸만 동그랗다. 헤아림을 잊은 숱한 날들이 나를 쓰다듬는다. 주홍의 낮과 까만 밤, 고슬고슬한 햇살, 나를 열고 들어오는 바람, 내게로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 날마다 날들을 힘껏 들이마셨다. 내리쬐는 햇살이 달아 아주 예쁘게 웃은 적도 있다.

어느 날일까. 어김없이 날들을 가득 들이켰다. 아! 내 안에 세상이 듬뿍이다. 한 가득이다. 내 안에 차곡한 햇살과 바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란하다. 이제 그만 내 안에서 나가야겠다고, 그러니 문을 열어달라고 다글다글 소리를 낸다. 발버둥을 친다. 세상에 처음 나와 햇살을 꼭 붙든 것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을 야물게 안았다. 그러라고 누가 일러준 것도 아닌데. 발버둥이 아파 눈을 꼭 감았다.

내 안의 발버둥을 버티느라 온몸이 덜컹거린다. 동그맣게 부푼 마음엔 어느 틈에 멍이 들었다. 멍이 번져 온몸에 푸른 물이 들었다. 온통 아파 마구 울었다.

실컷 아물면 된다.

내 안에서 누군가 가만히 속삭인다. 그 말을 붙들었다. 실컷 아프고 실컷 아물면 된다. 실컷 여물면 된다.



또 다시 어느 날일까. 나의 온 구석을 철썩이던 요란한 파도가 가라앉는다. 이윽고 잠잠해진다. 가만하다. 세상이 내 안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 안에 살기 시작했다. 낮과 밤, 햇살과 바람이 가지런히 포개진다. 내 깊은 어디에서 단단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햇살의 단맛과 닮았다. 내 안에 이 아름다운 것들이 찰랑거린다. 넘실거린다. 동그랗게 여문 내가 대기에 얼굴을 내맡기고 보드랍게 웃었다. 기쁨에 얼굴이 발갛게 빛났다. 마침 곁을 지나던 당신이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다.

와아. 빛깔 예쁜 것 좀 봐.

당신은 손바닥에 가만히 나를 올리고는 빙긋 웃었다. 나를 한 입 베어 문 당신이 말했다.

아 햇살 같은 맛. 바람 같은 맛.

나는 열매. 햇살과 바람과 오랜 기다림을 다 데리고 당신으로 들어간다.

당신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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