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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pr 04. 2020

나랑 여행 갈래요?  


어디로 갈진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도 너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글을 쓰지만 -몸 쓰는데 재능이 있었다면, 등으로 아스팔트 위를 비비면서 비보잉을 했을 테다. 나는 늘 몸짓의 언어, 그러니까 춤에 대한 갈망이 있다- 한편으로 나의 이러한 부분은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 편의 글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저마다의 존재감을 뿜어대고 있어서, 읽고 나면 "이게 무슨 말이지?"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글을 종종 쓴다. 보통 그런 글은 시간도 힘도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쓰는 나 자신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잘 안되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은 했으나 돈 떼인 심정으로 장렬하게 노트북을 덮는다. 지금은 보여주는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곳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지난날의 글에는 대부분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라는 문장이 꼭 들어간다. 불과 반년 전에 썼던 글에도 나의 이런 성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다시 읽을 때면 양 볼위에 미스트를 칙칙 뿌린 것 같은 촉촉하고도 엷은 핑크빛의 부끄러움이 내려앉아서 눈을 꼭 감곤 한다.


겉보기에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의 갈래들. 그 생각들을 잘 들여다보고 쓸만한 것을 골라내 하나의 이야기로 다듬는 이 과정이 내겐 참 녹록지 않다. 여권과 비행기표 하나만 달랑 들고 그 나라 공항에 도착해서야 낯선 언어를 더듬거리며 "음, 어디로 가볼까"하고 발길 닿는 대로 한걸음 떼는 스타일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떠난 여행에선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처럼(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을 혼자 가지만), 혼자 는 글이 아닌 이상 손가락 가는 대로 마구 쓰다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라는 문장을 휘갈기며 다시 노트북을 덮어버릴 순 없다. 보여주는 글쓰기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인 셈이다. 심지어 내가 떠나자고 제안한 여행이고, 흔쾌히 내 제안에 동의해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말 그대로 어깨에 배낭 대신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고 글쓰기를 한다.



같이 떠나볼래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쓸까?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을 써낸 적이 거의 없다.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 이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즐거워하는 눈치이지만, 나는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 이번에도 어떻게든 도착했다!'하고. 열어보면 즐거움만 가득 들어있을 것 같은 통통한 배낭 한쪽에 행선지 깃발을 착 꽂고는, 한치의 낭비도 없는 발걸음으로 노련하게 독자들을 인도하는 작가들을 보면 '아, 여행은 저런 사람과 함께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그제야 늦은 탄식을 하며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을 흘끗 본다. 그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도 가끔은 노련하다. 글을 쓰기 전에, 종이를 펼쳐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얼개를 그린 뒤 그대로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림을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되니 문장도 빠르고 망설임도 없다. 쭉쭉 나간다. 그럴 때면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등에는 희열의 땀방울이 흐른다. 혹시 나 천재 아니야?(응, 아니야.) 그러나 이런 경우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고, 대부분의 경우 '사실은 우왕좌왕하는 발걸음인데, 최대한 목적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경우엔 보통 글쓰기에 관련된 서너 가지의 주제,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데 그걸 입에 물 머금듯 며칠, 혹은 몇 주를 머금고 다닌다. 생각들을 머금고 거리를 쏘다닐 때도 있고,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볼 때도 있고(그러책상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누군가의 행동이나 말이 머금은 생각 주머니를 콕 터트릴 때도 있다. 요리하는 것처럼 서너 가지의 주제가 알맞게 뒤섞여 글 한편이 나올 때도 있고, 서너 가지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무심한 일상의 풍경 속에 갑자기 머금은 생각들이 잼 바르듯 쓱 발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늘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언제 어디서 뭔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에서 소재를 찾기도 한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어떤 글을 쓸지도 모르면서 마지막 문장만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어떤 글이 될진 모르지만 마지막 마무리는 이 문장이다! 하는 식인데, 이런 경우에는 희한하게 정말 그 문장으로 마무리를 하곤 한다.  


머릿속 생각들이 저들끼리 뒤엉켰든,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을 빌려와 새로운 무언가가 튀어나오든 간에 뭔가가 되겠다 싶으면 휘발되기 전에 재빨리 글로 옮겨야 한다. 그러니 지하철에서도 쓰고, 걷다가도 쓰고, 밥 먹다가도 쓴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신조-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긴 하지만-는 '써봐야 안다'는 거다.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옷이 눈에 띄어 가게 안에 들어가 눈으로만 살짝 보고 있으면, 점원이 다가와 "입어보는 거랑 달라요"하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물론 그건 옷을 팔기 위한 말이지만). 이제야 운명의 날개옷을 만난 기분이라도 막상 입고 거울 앞에 서보면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누구세요?"하고 묻고 싶은 때처럼, 머릿속으로 아무리 뭔가가 될 거 같은 기분이라도 글로 옮기면 다르다. 물론 정반대의 은혜로운 경우도 있다. 이게 될까 싶은데 또박또박 옮기면 글이 되기다.


내 글을 읽은 주변의 지인들이 이런 피드백을 줄 때가 있다.

"이 글 되게 신나게 썼지? 읽으면서 되게 신나는 게 느껴졌어."

"넌 금방 쓰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고 싶고, 또 고 싶다. 나는 한 번도 신나서 쓰거나 쉽게 쓰거나 금방 쓴 적이 없다. 이 글을 써내는데도 첫 문단만 무려 두 시간이나 낑낑거리다가(믿을 수 없죠? 저도 믿을 수 없더라고요) 결국 그 문단은 다 버렸다.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생을 하면서 뭔가를 쓰고 있다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기분이 좋다. 좋은 기분이 우주 끝까지 닿는다. 어쩌면 인솔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재미있고 신난다는데,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 짧은 여행이긴 여행이든 나와 함께 무사히 여정을 잘 마치고 "같이 가서 너무 재밌었어!"하고 말해준다면, 나는 기쁨으로 심장이 뻐근해져서는 금세 다음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고 나서는 한걸음 내디디며 또 맙소사! 하는 심정으로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뭘 믿고 따라오셨어요..." 하고 몰래 중얼거리면서. 내가 썼던 글을 읽으면서 '이걸 대체 어떻게 썼지?'라는 생각도 한다. 글을 쓸 때마다 태어나서 글을 처음 쓰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잠깐, 혹은 영원히 계속될 기세로 온몸을 휘감는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빈 도화지가 두렵다던데, 뭐든지 그리고 싶어서 붓을 든 손끝이 살짝 간지럽기까지 할 때는 빈 도화지가 두렵다는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나는 이제 그 말을 절감한다.


이렇게까지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배명훈 작가가 펴낸 <나는 SF작가입니다>라는 책에서 위로가 되는 문장을 찾았다(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어느 부분인지 찾을 수가 없어서 기억나는 대로 옮긴다). 글쓰기를 구조화하지 말라는 것, 쉽게 써지면 의심하라는 것, 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 쌓으라는 것. 구조화하고 싶어도, 쉽게 쓰고 싶어도, 새로 쌓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도 나는 늘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오늘도 A4 두장 분량의 여행을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 이번 여행이 즐거우셨다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같이 떠나볼래요? 어디로 갈진 모르겠지만, 같이 가준다면 는 좀 많이 행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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