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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pr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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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


와 닿은 맨 처음만으로 순식간에 전부를 알게 되는 어떤 일이 있다. 눈을 한번 깜빡하기도 전에 일을 둘러싼 맨 처음과 맨 끝이 동시에 나를 통과한다. 어떤 그림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게 되는 찰나처럼.



한 사람이 나무를 심었습니다

외갓집, 한쪽 구석에 놓인 문짝 달린 작고 오래된, 밥을 많이 먹고 난 배처럼 화면이 볼록한 테레비에선 언제나 뉴스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TV와 테레비는 전혀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한다'는 노부부의 신념 때문이다. 사람 죽은 얘기, 사고 난 얘기, 정치인이 사기 친 얘기... 밥을 먹을 때도 두 사람의 눈과 귀는 오로지 레비를 향해있어서, 밥 위에 반찬 대신 누가 죽은 이야기와 누가 누구에게 사기 친 이야기와 사고 난 이야기를 얹어 먹는 건가 싶었다. 외할머니는 테레비를 보면서 자주 혀를 찼고, 외할아버지는 욕을 했다. 이게 세상 돌아가는 거라면 잘 몰라도 되지 않을까. 물건만 샀다 하면 상인에게 깜빡 속아 아주 후진 것 비싼 을 치르는 외할머니와, 지인들의 결혼식 식사권을 오랫동안 여러 장 모았다가 나를 데리고 텅 빈 웨딩홀로 가서는 "왜 이걸 쓸 수 없냐!"라고 직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외할아버지야말로 세상 돌아가는 걸 누구보다 모르는 사람들 같았는데.


내가 여섯 살쯤 먹었을 때의 식목일 아침이었다. 그날도 외갓집이었고, 한쪽 구석의 테레비에선 쩌렁쩌렁한 볼륨으로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식사 준비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혼자서 할 일도 없이 물끄러미 테레비만 보고 앉아있는데, 마침 식목일이라고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 제목은 <나무를 심은 사람>. 시작하자마자 바로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무언가가 나를 통과했구나. 숨이 막혀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누군가 앞에서 눈물을 들키긴 싫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내 모든 감각이 테레비 화면에 고정되었다.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땐 인터넷도 없는 데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음 해 식목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방송사에선 매년 식목일마다 약속처럼 <나무를 심은 사람>을 틀어주었고, 나는 식목일 아침이면 테레비 앞에 붙박여서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었다. 식목일을 맞이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었던 셈이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단순하다(원래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단순한 법이다). "한 사람이 황무지에 도토리를 계속 심었더니 마침내 아름다운 숲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왜 나무를 심었을까?

<나무를 심은 사람>은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1953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40년쯤 지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고, 다시 또 몇 해가 흘러 작은 테레비 앞에 앉아있는 동양의 한 아이에게 스며들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숨이 막혀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 이듬해 봤을 때는 '몇십 년간 도토리를 심다니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 뒤에 봤을 때는 '그런데 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표를 품었다.


이 작품은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입시를 위한 한 줄 요약을 사랑하는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해 풀이까지 되어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무를 심어 자연과 인간에게 희망을 준 양치기 노인의 헌신을 이야기함"

"황무지 마을을 풍요로운 곳으로 바꿔낸 양치기 노인의 헌신적이고 위대한 노력"

작가가 평소 좋아하던 색이 보라색일 뿐 아무 의미 없다고 밝혔는데도, 교과서에만 실렸다 하면 보라색이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는 슬픈 색'으로 둔갑해버린 것처럼(시험 문제 정답이 '작가가 좋아하는 색깔이라서'는 안되나?), <나무를 심는 사람>도 교과서에 실린 이상 '희망' '헌신' '위대한 노력' 쓰리콤보의 매질을 피해가진 못했다(오 맙소사!). 이 작품을 교과서로 만나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그러면 시험을 대비해 주어진 정답만 달달 외우느라 물음표를 가져볼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희망, 헌신, 위대한 노력만 놓고 보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고는 그 형벌로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 급의 살신성인 정신이 엿보이기까지 한다.  


원제인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을 모른다 하더라도, 이 작품은 엄연히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가 친절하게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적어놓기까지 했다.

"저분은 스스로 행복해지는 훌륭한 방법을 발견한 거야!"라고.

물론 그가 황무지에 숲을 가꾸고 행복해지는 과정에는 헌신과 어마어마한 노력,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뒤따르지만 가장 아래에 포근하게 깔린 것은 행복이다. 생크림이 아무리 근사하게 올라간 케이크라도 시트가 없으면 그건 케이크가 아닌 것처럼. 아내도, 자식도 죽고 홀로 황무지에서 살고 있는 한 남자의 행복해지기 위한 고요하고오래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복은 그저 주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굳게 믿는, 아무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만히 자기 몫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


이처럼 무감각하게 되풀이되는 생활 속에서는 아무리 착실한 사람이라도 무너지고 만다. 여자들의 마음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오른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한다...(중략)... 끊임없이 다투어댄다

매일 도토리를 심던 사람이 살던 세상의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났고, 모든 것은 폐허가 되었고, 아내와 식을 잃은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일과 상관없이 그저 도토리를 심는다. 물이 새지 않도록 손질한 지붕, 가지런히 정돈된 살림살이, 깨끗하게 닦인 그릇, 기름칠된 총, 끓고 있는 수프, 기운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기워진 옷과 튼튼하게 달린 단추... 한 줄 요약만 읽고는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알뜰하게 보살피면서 자기가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작가는 말없이, 그렇지만 촘촘하게 보여준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아야 한다고 하루 종일 테레비를 틀어놓고는 거기다 대고 혀를 차고 욕을 하던 노부부도 내가 알기론 착실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행복을 잊고 살았다는 걸, 어쩌면 한 번도 자신의 행복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걸, 세상의 가장자리를 향해 하루하루 밀려난다는 서러움에 매일 그렇게 테레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그들이 행복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끔찍이 아꼈던 손녀딸에게 아주 많은 몫의 행복을 선뜻 떼어주려고 했을 테니까. 도토리를 심던 남자의 나이와, 테레비를 보며 욕을 하던 부부의 나이가 엇비슷했다는 사실을 글을 쓰며 가늠한다.



나도 나무를 심습니다

"나도 거들겠다고 했으나, 노인은 자기 일이라고 했다. 사실 그랬다."

아주 어렸을 때 품었던 물음표에 대한 답은, 빨간 날이었던 식목일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까만 날이 되고(식목일은 공휴일 지정 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2006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내가 식목일 아침마다 테레비 앞에 앉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식목일이 공휴일이라서 가능했다), 식목일의 색깔이 변한 것처럼 식목일 아침을 대하는 나의 마음도 두근두근 빨간색에서 무덤덤한 까만색으로 변한 뒤에도 한참 시간이 흘러, 나중에는 잊은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잊었다가 조금씩, 아주 천천히 알게 되었다. 잊은 것과 마찬가지로 알게 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알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음표에 대한 해답은 물음표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구도 거들 수 없는 나만의 물음표를 비로소 가지고는, 물음표의 구불구불한 곡선을 따라 힘겹게 오르고서 마침내 다 올랐나 싶을 때 별안간 아래로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물음표를 살아보면서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프레데릭 백은 5년 동안 홀로 2만 장의 그림을 그렸다. 외갓집에서 순식간에 나를 통과해버린 무언가는 제 몫의 물음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매일 자기만의 도토리를 심는 사람들의 압축된 정신이었던 것 같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한 사람의... 행동이...(중략)...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그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물을 만난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필 그때 테레비 앞에 앉아있던 바람에 그들의 정신이 내게 조금 묻어버린 것 같다. 행복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찾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평생 물음표를 서성일 수밖에 없지만 마침내, 모든 물음이 다 끝나면 평온하고도 단단한 온점이 가만히 나를 반겨주겠지(물음표의 모양은 정말 놀랍다).

 

뚜렷하지는 않겠지만 희미한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오늘도 나만의 물음표를 심는 중이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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