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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pr 23. 2020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을 잡았더니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눈에 보이질 않아서 도무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진심'때문에 시작되었다. 진심은 나를 늘 괴롭혔다. 도무지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린 부모는 삶과 다투느라 내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고,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친구들에게 차마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다른 동물들이 흘린 깃털로 자기를 장식하는 이솝우화의 까마귀처럼, 나도 반짝이는 사람들이 흘린 반짝이 가루를 찍어 바르고는 반짝반짝 빛나는 척했지만, 늘 어딘가 모자라고 못나다고 느껴졌다. 사람들 앞에서 괜찮다고 말하는 내 얼굴은 웃고 있는데, 같은 순간 내 마음 어딘가는 찌그러지는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늘하고 쓰렸다. 집에 돌아와 남의 깃털을 다 뽑아내고 거울 앞에 선 맨숭한 까마귀의 심정으로, 종이에 진심을 옮겼다. 내 안에 고여있는 진심이 너무 많았다. 이게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온통 다 밉고, 싫다는 못난 마음뿐이었다.



돌멩이 하나. 장난

"글을 한번 써봐."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국문과 선배가 내 글을 읽고 했던 말이다. 선배는 밉고 싫다는 못난 마음을 이렇게나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에서 희한한 장인정신을 느꼈는지, 아니면 국문학도로서 만나는 사람에게 으레 하는 인사치레였는지 내게 글을 써보라고 지나가듯 말했고, 나는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그 말을 붙잡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국문학도가 아닌가! '뭐야 뭐야, 나 국문과 선배가 써보라고 할 정도로 잘 쓰는 거야?' 그 뒤로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작가님"이라고 불렀는데, 무려 국문과 선배가 그렇게 불러준다는 사실이 무척 쑥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선배가 권해준 시집 몇 권과 소설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오, 그 부분 좋았죠!"하고 떠들어댔다. 주변의 몇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배의 말이 생각나 뒤통수가 가려울 때 가끔 글을 썼다.


돌멩이 둘. 충고

떠밀리듯 졸업하고, 떠밀리듯 취업했다. 술과 연애와 시험이 받치고 있던 내 세계는 사라졌다. 연애는 있다가도 없고, 술은 취한 듯 싶어도 결국엔 깨야했다. 중간, 기말만 있는 줄 알았던 시험은 예고도 없이 계속되었다. 후들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붙들고 살았다. 매일의 낮과 밤이 캄캄했다. 그러다 우연히 번역가 언니를 알게 되었다. '멋있다'의 사전적 정의가 사람이 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싶게 멋있었다. 사람이 제 안에 단단한 심지가 있으면 그렇게 멋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언니를 몹시도 부러워하다 어느 날 나의 작은 진심 한 조각을 꺼내놓았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그런데 나는 아마 안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때 언니가 내게 상큼한 번개 한 방을 날려주었다.

"그래서 넌 지금 뭘 쓰고 있는데?"
"네? 전 작가가 아닌데요."

"작가는 되는 게 아니라 하는 거야. 작가라면 언제나 쓰고 있어야지 않겠어?"

나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했고, 믿지 못할 사람이 쓰는 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작가라면 언제나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돌멩이 셋. 비난 

그 뒤로 시간이 흘러,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고 작은 잡지사에 들어가 글을 썼다. 문학을 전공한 동갑내기와 일하게 되었는데, 그때 '합평'이니 '등단'이니 하는 말을 처음 들었다. 등단을 준비하던 친구, 글로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제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가지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겁이 덜컥 났다. 글로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어려움에 겁이 난 게 아니라, 나의 무지와 순진에 겁이 났다.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살기를 꿈꾸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비로소 알았다. 작가들이 굶어 죽는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올 때였다. 작가들도 굶어 죽는데 내가 뭐라고... 안 그래도 겁에 질려있던 내게, 같은 회사에 다니던 선배 하나가 동갑내기 친구와 비교하는 말을 했다.

"넌 지금 네가 잘 쓰는 것 같지? 오 년 뒤에 봐라. 쟤는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니까 책도 내도 등단도 했을 텐데, 넌 오 년 뒤에 아무것도 없을걸."


그 말을 들은 지 꼭 오 년이 흘렀다. 이제는 출판사에서 "작가님"하고 전화가 온다. 꾸준히 글을 썼더니, 다른 곳에도 글을 쓸 기회가 생겨서 현재 두 곳의 플랫폼에서 연재를 하고 있다. 함께 책을 쓰고 싶다는 제안도 들어와 지난해에는 내내 원고 집필에 매달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군가가 내게 돌을 던진다. 장난일 수도 있고, 나를 생각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악의가 담겨있을 수도 있다. 그들이 내게 던진 게 그 뭐든 간에 정작 던진 사람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내가 한 선택은 날아오는 돌멩이를 잡는 거였다. 맞고 아파하는 건 지겹게 해 봤으니까 차라리 잡아서 내 걸로 만들자. 글에 언급한 것 외에도 무수한 돌멩이가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못 피하는 돌은 맷집을 키운다는 그런 마음으로 계속 걸어 나갔더니 내게도 기회가 왔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진심을 쓴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했던 내 진심을 밖에 보여줬더니, 그 진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글을 쓴다.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할 수 없다면, 한번 꽉 잡아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게 날아온 돌멩이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분명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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