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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21. 2020

'좋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  


쓰고 싶어서 씁니다. 오랜만에.


쓰고 싶어서 쓴 지 오래됐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예상했던 날짜보다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지만, 일정을 맞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쏟아붓고 있습니다(오늘만큼은 책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왜 또 글이 책 얘기로 흘러가는 걸까요). 써야 하는 글을 쓰는 거죠. 연재도 해야 하니, 마감 하루 전에 모니터 앞에 앉아 끙끙거리면서 또 써야만 하는 글을 씁니다(미리 써놓으면 좋게요!).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간신히 처리하고 나면, 안 해도 되는 것들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요즘 작지만 새로운 일들을 겪고 있어요. 책 계약금이 수 천만 원은 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어서 깜짝 놀랐지만, 어쨌든 내가 만든 무언가에 돈을 지불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꽤 생경한 감각이어서, 결과물이 무엇이든 살면서 이런 감각을 한 번쯤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 그리고 저자 프로필 촬영이라는 걸 처음으로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사진 찍히는 게 어색하고 싫어서 대학교 졸업 사진도 안 찍었거늘. 아직 싸인도 못 만들었는데, 정말로 필요할지도 몰라서 개발(?)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가운데,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행복하겠다'라는 말이었어요. 하고 싶은 걸 하니 행복하겠다, 꿈을 이뤘으니 행복하겠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각자 다른 건지, 아니면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루와 같아서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고 좋아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인지, 하고 싶은 것들은 결국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질문에 대한 답을 못했습니다.  


행복이란 뭘까? 사춘기 소녀 같은 질문 하나를 품고 살다가, 며칠 전에 우연히 서점에 들러 들춰본 책에서 같은 고민을 발견했습니다. 먼 나라의 어느 철학자가 쓴 책이었어요. '좋음'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 내용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그가 내린 답을 모릅니다만, 목차만  살펴보면 좋음은 곧 유용함(쓸모 있음)이고, 유용함은 곧 행복인 것도 같네요. 그럼 행복이란 쓸모 있는 것들을 많이 가진 상태일까. 삶에서 꽤 요긴 쓸모들을 꼽아봅니다. 돈, 집, 자동차, 멋진 외모, 타고난 재능... 뭐 빤하지만 빤하게 쓸모가 많은 것들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쓸모가 많은 사람일 테고, 쓸모가 많으려면 안 하면 안 되는 것들도 잘 해내야 하니, 이런 논리로 따져본다면 전 행복한 사람이 맞아야 하는데.


어제 점심시간에 사무실 근처를 한 바퀴 도는데 마침 대표님을 길에서 만난 거예요. 자연스럽게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하게 됐어요. 차도 한 잔 얻어마시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매출이 줄면서 회사도 어려운 고비를 막 넘긴 참이라, 대표님의 그간 마음고생 얘기를 한참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그런 얘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요새 좀 어때?"라는 물음에 "매우 안 좋습니다"라는 대답을 하면서 눈물이 슬쩍. 아이고. 대표님이 손수건을 건네면서 "네가 행복한 선택을 해. 이기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렇죠. 행복하려면 회사로 가는 지하철 말고,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잡아타면 되는 거죠. 클라이언트 전화는 다 안 받으면 되는 거죠. 원고는 언제까지 달라는 출판사 말에는 묵묵부답이면 되는 거죠. 그렇지만 이걸  저질러버리면 행복할까. 회사 안 다니고, 책 준비 안 할 때는 행복했냐고 물으면 그건 그거대로 애매하단 말이에요. 커서 속도에 맞춰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초록창에 '행복'이란 단어를 집어넣어봤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을 때의 상태를 말합니다. eudaimonia는 ‘eu(좋은)+daimon(영혼)’이라는 의미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복 - 행복이란 원하는 것 중 내가 가진 것 (인간의 모든 감정, 2011. 4. 10., 최현석)

행복한 삶이란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니. 이어지는 글에서 글쓴이는 '지금은 공감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지만요. 왠지 공감하는 입장에서는 그러니안 하면 안 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거고, 그럼 사람들이 나에게 "요즘 행복하겠네"라고 하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요즘 안 하면 안 되는 일을 했겠네."라고 묻는 셈이니까요. 질문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렇다면 "네가 행복한 선택을 해."라는 말은 "네가 안 하면 안 되는 것을 선택해."라는 말인 거네요. 안 하면 안 되는 것. 태어나서 꼭 해야만 하는 것. 그래서 나를 좋은 영혼으로 만들어 주는 것. 안 해도 되는 것과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걸러내고,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행복이 있다니.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해내는 것이 행복인 건지,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뿌리치고 때론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행복인 건지. 이 모두가 행복인 건지.


행복하지 않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이 글을 쓰면서, 문득 행복해졌어요. 쓰고 나서 다 지워버릴 요량으로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안 쓰면 안 되는 글이었나 봅니다. 어쩌면 안 써도 되는 글이었을 수도 있고요. 뭘 쓰든 행복했을 거 같아요. 실은 '쓴다'는 그 자체가 제겐 행복이니까. 글을 써놓고 보니 '써야 해서 행복하지 않다'라고 중얼거려놓고는 '쓰고 나서 행복하다'는 결론을 맺네요. 저란 사람이 좀 그렇습니다. 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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