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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03. 2020

첫사랑이 뭐 별건가요

그때 쓴 인터뷰 기사 중 일부


'좋아하는 일'이라는 환상

몇 년 전,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며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몇 달째 무수입으로 지내고 있던 청년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물론 지금은 외국에서 상도 받고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으세요. 리스펙!). 코너 주제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청년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제가 한 질문 중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히 인상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빤해서요.

"좋아하는 일 하니까 행복하세요?"


그때 저도 멀쩡한 직장 박차고 나와 글 좀 써보겠다고 작은 잡지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라 "억대 연봉은 포기했지만 행복합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지요. 그 무렵의 솔직한 내 마음은 후회와 불안이었거든요. 누가 제게 "네 선택은 잘한 거야"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청년의 대답은 "아니요". 정확하게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넌 좋겠다, 행복하겠다, 네 일을 하고 있어서... 이런 얘기 주변에서 많이 들어요. 그런데 어쨌든 나름대로 힘들어요. 다들 힘든 건 마찬가지죠. 정석 같은 얘기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견딜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요."


흔히 '좋아하는 일=행복'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청년이 주변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저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넌 좋아하는 걸 하잖아."

"그래도 넌 하고 싶은 걸 찾았잖아."

"그래도 넌 네 꿈을 향해서 가고 있잖아."

힘들다, 어렵다는 나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그래도..."로 시작하는 이 한마디로 내 입을 막았습니다. 마치 넌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요. 그래도의 저변을 곰곰 살펴보면 바로 '좋아하는 일=행복'이라는 공식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어요. 이 공식이 왜 사람들 사이에서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나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일을 해본 사람이 없거나 극히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해보면 모르니까요. 멀쩡한 대학 들어가서, 적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취직 잘되는 전공을 (어머니의 바람대로)택하고, 유학까지 갔다 와놓고는 결국 좋아하는 걸 해보겠다고 그렇게 어리석은 길만 고르고 골라온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똑같은 선택 안 할 겁니다."


좋아하는 일 하겠다고 나섰다가 돈도 못 벌고(얼마 된다고 몇 개월치 월급 떼인 적도 있습니다), 자리도 못 잡고 빌빌거리고, 자존감은 자존감 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행복하긴 뭐가 행복해. 가시밭길도 꿈을 향한 과정이니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기를 종용하는 그룹 1 외에 저를 볼 때마다 충고를 일삼는 그룹 2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가 한 충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니다 :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결국 싫어하게 되니까 좋아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로 남겨두어라.

2) 좋아하는 일은 실컷 해봤으니 이제 그만 됐다 : 좋아하는 일로 잘 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제발 정신 차려라.


그 당시, 제 주변에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다른 조언을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이런 말을 실컷 듣고 온 날은 잠자리에 누우면 한 가지 생각만 뚜렷했습니다. "나 지금 되게 잘 못 살고 있는 거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택했으니 돈이며 안정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행복하기라도 해야 되는데 이건 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이불 대신 허탈함과 열패감을 덮어 쓰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정말로 평생 렇게 살 것 같았어요. 어디에도 내 행복은 없는 거구나.



'좋아하는 일'은 자기도 몰라요

이제는 저를 더러 주변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구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근성 있는 사람도 아니고, 별이 딱 박힌 '꿈★은 이루어진다'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도 아니어서 '꿈, 꾸준히, 노력' 이 쓰리 보가 되게 이상하거든요.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제가 유일하게 잘 한 건 '좋아하는 일'에 대한 환상을 안 가진 거예요.


첫사랑이 생기면 다들 그 상대에 목을 맵니다.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나고,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고, 그 사람이 아니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고... 물론 첫사랑과 멋지게 연애하고 결혼까지 골인한 후 알콩달콩 사는 커플들도 많지만, 첫사랑의 진가는 헤어져봐야 비로소 알거든요. "오, 그 사람이 다가 아니었네? 더 괜찮은 사람이 있네?" 하는 통렬한 깨달음이 뒤통수를 빡 칩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마음도 첫사랑과 좀 비슷해요.  일 아니면 안 될 거 같고, 이 일이 아니면 내 인생은 아무 가치가 없고, 이 일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매달리는데, 매달려보면 막상 생각이랑 다르거든요. 해보니까 별거 없고, 이게 맞나 싶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별로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고, 괜히 후회되고(물론 첫사랑과 잘 사는 커플이 있는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찾아 가슴 뛰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도 분명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첫사랑이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면 가슴 한편에 아릿한 추억으로 남아있겠지만, 사실 또 그게 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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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나도 그거 참 좋아하는데...예전에 상도 받고..."하고 썰을 푸는 분들도 많은데, 면전에서 이런 말 하면 안 되니까 꾹 참고 있지만 제가 하고 싶은 대답은 "그거 사실 안 좋아하는 거예요"라는 말이에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그럼 틈만 나면 유튜브 붙들고 앉아있겠어요? 손이 근질거리는데. 운동하는 걸 좋아해. 그럼 굳이 '주 3회, 하루 한 시간'이라고 벽에 써붙여 놓지 않아도 운동을 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거니까. '좋아하는 일'이라는 건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하는 게 없다. 틈만 나면 그냥 핸드폰만 보고 누워있다"하는 분들도 괜찮습니다. 좋아하는 일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자기 편하고 행복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누워서 핸드폰 보는 그 순간에 자기가 만족스러우면 되는 거예요.


제가 위에서 "좋아하는 일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똑같은 선택 안 할 겁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반틈은 맞고 반틈은 틀립니다. 저는 시간을 되돌려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설 거예요. 저는 그런 걸 찾아 나서는 게 기쁘고 즐거운 성격이거든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일=ㅇㅇ'이라는 공식은 안 세우고 살려고요. 고생도 너무 독한 고생이었고(물론 그 시간 동안 제 안에 쌓인 것도 많겠지만)두 번 다시는 그런 시간을 경험하고 싶진 않아요. 혹시 아나요? 졸업 후에 은행을 갔어도(그땐 죽어도 못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빵빵한 재테크 정보가 실린 책을 썼을 수도 있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전공했으면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정답은 아무도 몰라요. 애당초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좋아하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내 삶에 극적인 변화나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에요. 인터뷰에서 청년이 말한 대로 여러 선택지 중에 '좀 더 견딜 수 있을' 뿐인 거죠. 만약에 좋아하는 일을 찾는 분이 있다면, 평소에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꾸준히 하고 있는 게 무언지 한번 살펴보시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고 싶어요. 자기도 모르게 틈만 나면 하던 걸 좀 더 많이, 오래 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인생 좀 견딜만하거든요. 저는 뭐 그렇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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