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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02. 2020

당신의 혐오는 어디를 향하나요


"아씨, 망했다..."

나의 처절한 절규에 옆에 서있던 남자가 힐끔 나를 봤다. 졸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릴까 하다 환승이 번거로워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 역 4개 노선이 한데 만나는 지점인 데다 퇴근시간이 겹쳐 내리기는커녕 밀고 들어오는 인파에 되려 뒤로 밀렸다. 어떻게든 내리려고 인파를 뚫다가 지하철 문이 닫히는 바람에 팔을 끼이고야 다시 뒤로 물러났다. 왜 잠결에는 상황 판단력이 이렇게나 떨어질까. 늦으면 안 되는 약속은 왜 어김없이 변수가 발생하는 건지. 온갖 짜증이 따라붙는다. 서울을 떠야겠어, 먹고살기 지긋지긋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업무가 너무 피곤해 퇴근 후 운 좋게 앉은 전철의 빈자리에서 곯아떨어졌고, 그 바람에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쳤고, 중요한 약속을 못 지켰고, 팔을 다쳤다. 어느 하나 내 잘못이 없는데 아픔은 고스란히 나의 몫. 아픈 팔을 주무르며 집으로 가는데 감정이 치밀었다. 이 감정에 라벨을 붙인다면 '혐오'. 나는 이 상황에  몹시 혐오를 느낀다.


혐오 발견

우연히 발견한 어느 노래를 듣다가 목소리가 너무 좋아 가수가 누군가 싶어 검색을 해보니, 가수 사진보다 밑에 달린 댓글이 하나 눈에 띄었다.

"표정이 혐오스러워요"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표정이 뭐가 어때서. 긴 머리의 여성이 고요히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면 남의 사진에 이렇게 단단한 혐오를 박아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알려지지 않은 가수라 사진 아래 혐오를 실은 댓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지만, 유명한 가수였다면 혐오를 더 큰 혐오로 되돌려주려는 온갖 댓글들로 뒤덤벅 됐을 것은 눈에 보이듯 빤한 일. 댓글을 본 내 마음 역시 글쓴이를 향한 혐오로 뒤틀렸으니. '혐오스럽다'는 말을 생각한다. 혐오가 언제부터 우리의 일상 언어가 되어버린 걸까. 물론 혐오라는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전에 실려있는 말이지만 우리의 삶에 자주 등장하진 않았다. 싫다, 밉다, 정말 싫다 등의 표현이 이젠 혐오로 바뀌었다. "나는 너를 미워해"라는 말과 "나는 너를 혐오해"라는 말의 간극은 얼마나 멀고 깊나.


혐오에 대한 혐오를 품고 며칠을 보내다 신문에서 칼럼을 하나 읽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소설가가 쓴 칼럼이었다(제목: 혐오가 난무하는 댓글창... 그 폭력적인 속마음, 진짜 모습이 아니기를). 소설가는 커트보니것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비밀돌이'를 꺼내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비밀돌이는 철제 상자에 이어폰이 달린 형태로, 이어폰을 귀에 꽃으면 진실의 말을 들려주는 물건이지만, 비밀돌이가 속살거리는 것은 뜨끔할 정도로 고약한 부분들이다. 비밀돌이를 발명한 '헨리'의 아내인 앨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비밀돌이를 듣다 결국 참을 수 없어 땅에 묻어버린다. 소설가는 말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댓글창이 비밀돌이와 비슷한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할 속마음을 댓글로 써서 올리는 것 같다고. 그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으면 한다고.


나도 물론 그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안다. 그것 역시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다. 선하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악하고 비열하고 역겨운 것 역시 사람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 역시 사람의 일부이고, 삶의 일부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선해지라고, 혐오를 가지지 말라고, 그게 당신의 진짜 모습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없다. 그렇지만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비밀돌이를 땅에 묻어버린 앨런의 행동처럼, 혐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우리는 사람으로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다른 존재를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혐오가 사람을 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혐오가 기르던 고양이를 40층 아파트 밖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로, 길고양이의 다리를 자르는 걸로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선택

'선택'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심리 용어로 풀이된 부분이 있다.

선택
[심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의식하고,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골라내는 작용.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혐오라는 말이 그동안 우리 삶에 쉽게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옛날 사람들이 하도 착하고 순진무구해서 혐오라는 감정을 몰랐던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혐오를 혐오로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에,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는 너를 혐오해"라는 말이 "나는 너를 미워해"라는 말로 대치되기까지는 숱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깊은 혐오를 느끼며 지친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다 하늘을 봤는데 낮달이 걸려있었다. 몇 분간 서서 하늘을 한참 봤다.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는 그날따라 맑은 노을이 지고 있어서, 하나도 예쁘지도 않고 쓰레기 봉지만 뒹구는 집 앞 골목이 붉게 물들었다. "참 쓸데없이 예쁜 일을 하시네요" 듣는 이도 없는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리면서 노을을 한참 봤다. 낮달도 저렇게나 예쁘고 노을도 쓸데없이 예쁘니, 삶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혐오를 갖고 있던 나는 결국 삶은 살아볼 만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집에 들어가 지친 어깨를 두드리는 거다. 내일이 되면 지하철에 올라타 또다시 들끓는 혐오를 느끼겠지만, 이렇게 살아서 뭘 하나! 한숨을 토로하겠지만 말이다.


혐오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른 것처럼 그 방법 역시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 방법이 무어든 간에, 나는 사람들이 혐오를 혐오로 내버려 두지 않기를 바란다. 혐오를 불씨 삼아 더 큰 혐오로 되돌려주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창이 갈 곳 없는 혐오들의 대나무 숲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 고인 혐오가 우우 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울게 하고 다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가장 악랄한 진심은 각자의 땅에 묻어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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