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이 추웠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누웠다가 일어나서 과제를 할 생각이었는데 맙소사. 도어록이 안 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번이 하나인데. 연거푸 눌렀더니 경보음 소리가 났고, 마침 품에 맥주 네다섯 캔을 안고 퇴근하던 2층 집 아저씨가 나를 보고 물었다. "비번을 까먹었어요" 아저씨는 하하 웃으면서 올라갔다. 나도 그때까지는 웃었던 것도 같은데 한 시간을 넘어가자(배터리 방전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블로그 게시물을 보고 건전지를 사 와서 별 짓을 다해봤지만 안됨)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회사에서 개발 중인 치매 증상 완화 제품이 생각났다. 수업도 있고 중요한 약속도 있는데 "비번을 까먹어서 집에 못 들어갔어요. 죄송"이라는 말을 해야 하나. 업체에 전화했더니 비번 잊은 건 다 뜯어야 돼요, 사람 불러서 기다려야 하고 돈도 돈인데 잘 생각해보세요 아가씨. 하는 말을 하고 끊었다. 생각이 하나밖에 안 나는데요. 핸드폰도 거의 방전 직전인 데다 수중에 가진 현금이 없어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십오만 원만 보내주라" 라디오 출연은 문을 따기 위한 빅피처였나. 동생은 돈을 보내주면서 나에게 병원을 가봐야 되는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물었고, 추위에 떠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업체에 전화해서 문을 따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옆집 문이 열렸다. 지난가을에 이사 온 남자인데 지난가을에 눈인사만 한번 하고 말았던 사람이다. 밤늦게 경보음이 계속 울리니 시끄러워 나왔나 싶어 "늦은 밤에 죄송하다"라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분은 술 먹느라 몰랐다며 왜 그렇게 서계시냐고 물었고 비번을 몰라서 이러고 있다며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답했다. 이상한 사람 아니니 집에 들어와서 몸 좀 녹이세요,라고 그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비밀번호가 기억났다. 기억났다기보다는 원래 이 번호였나, 할 정도로 내 머릿속에서 생경한 번호였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누가 비밀번호를 바꿨을 리도 없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분이 나를 불렀다. 건전지 문제일 수도 있다며 건전지 교체를 해주셨다. 그리고 지금 주무실 거 아니면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했다. 밤늦게 삐비 빅 댄 것도 미안하고 초면에 건전지 얻어 쓴 것도 감사한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닌 거 같기도 해서 옆집으로 건너갔다. 나에게 "이사 가려다가 실패해서 계속 사신다면서요?"라는 말을 해서 잠깐 혈압. 작은 탁자 위에 술이 주종별로 있었고 안주도 여러 가지를 알뜰하게 챙겨 드시는 중. 안주 사이에 다이어트 약이 있길래 "초면에 죄송한데 표리부동 아니세요? 한 가지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 집에 어떻게 이사 오게 됐는지, 왜 안주가 이렇게 종류별로 있는지, 집에서 최근에 김치를 보내줘서 안주로 먹고 있다는 그런 얘기를 앉아서 들었다. 빚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 힘든 일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왜 사람은 때론 모르는 사람에게 깊은 속내를 털어놓게 되는 걸까? 취기 때문인지 똑같은 말이 거듭된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가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와 엄마가 보내줬다는 감말랭이를 쥐어줬다. 냉장고 자석도 하나 얹어서. 주변에서 나를 보고 '인생이 시트콤'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거듭 부인하지만 이건 너무 시트콤 같은 상황이라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