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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28. 2021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어요

최근에, 내가 정말로 많이 아꼈던 가게가 없어진 걸 알아내곤 좀 황망한 마음이 되었다. 몇 년간 가게가 있던 자리에는 며칠 새에 서느런 철골이 대신 서 있었다(서울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허물고 짓는 게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적응이 안된다). 가게로 전화를 걸어 봤더니 당연히 받지 않아서, 평소엔 인스타그램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굳이 가게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내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이 지난 어제 답을 받았다.
"우리 카페를 좋아해 주시고 궁금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좋은 손님들 덕분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사장님은 건물 재건축 문제로 문을 닫았다고 했다. 창문에 복닥복닥 붙어있던 큐방을 타고 들어오던 햇살은, 단정한 오렌지색 소파는, 좋아하던 사람과 나누었던 이야기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바밤바 아이스크림은 결코 재건축될 수 없을 텐데. 장소에 모든 마음을 덥석 주는 나는, 장소가 사라지면 그곳에 주었던 마음을 어떻게 돌려받고 어떻게 꺼내보아야 할까. 나의 작은 한 부분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삶은 '다시'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이 아름다운 거겠지만.

2017년 3월 1일 일기


요즘 들어 부쩍 '완결'을 알리는 소식이 눈에 띈다. 즐겨 읽던 웹툰 하나가 7년간의 연재를 막 끝냈고, 처음 가봤을 때부터 단박에 반해 아끼는 사람들과 곧잘 찾던 작은 식당이 15년간의 운영을 마치고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가끔 들러 시간을 보내던 비건 카페도 얼마 전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무엇이 마침내 사라진다고 하면 내가 거기에 두고 온 마음과 이야기들이 함께 휘발되는 것 같아 마음이 금세 우울하고 초조해진다. 특히 나는 장소에 애착이 강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고 그와 똑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장소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절대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사라진, 혹은 곧 사라질 공간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자려고 누워 핸드폰을 뒤적이다 웹툰 완결을 알리는 작가의 말을 읽었을 때도, 인스타그램으로 카페의 영업 마감 소식을 보았을 때도 처음에 든 감정은 먹먹함이었다. 끝났구나. 좋아하던 것이 또 하나 사라지는구나. 이제 내가 이곳에 쏟아부었던 마음과 시간은 도무지 돌려받을 길이 없고 하나의 세계가 문을 닫는구나. 내게는 다시는 디디지 못해 그립기만 할 세계로 남는구나. 근사한 계절 음료가 나오면 먹으려고 모아둔 쿠폰의 도장 개수를 차곡차곡 헤아려보면서 생각했다. 좀 더 많이 가봐야 했다고, 시간과 걸음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고.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작가의 말과 가게의 소식을 곰곰이 읽어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끝을 말하는 글에서 이야기하는 건 끝만이 아니었다. 모든 글에서 공통적으로 '계속'이 보였다. 웹툰은 끝나지만 다른 채널을 통해 팬들과 교류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으니 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은 사라지지만 그곳에서 함께 나누고 배운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이어주고 있어서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살아있다, 와 같은 말들. 그렇구나. 왜 무언가가 사라지면,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과 아끼지 않고 주었던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믿고는 못내 안타까워했을까. 나와 같이 아끼고 매만지는 마음들이 여럿이라면, 그런 마음들 덕분에 웹툰이든 공간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 시간이 오래 지나도 여전히 그곳을 떠올리고, 그런 곳이 있었지 잠시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내 안에서 살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 존재하지 않고 여실히 존재하 중.  


어제 오랜만에 나의 기타 선생님을 만났다. 회사 일도 책을 준비하는 일도 버거워 한 주에 한번 듣던 기타 레슨을 그만두고는 선생님, 다시 봬요 한 것이 두어 해를 넘겼다. 선생님이 따라주시는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 중, 선생님이 이런 말이 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접한다 해도 부끄러울 게 없으면 되는 것 같다. 끝마디가 부끄럽지 않다, 였는지 부끄러울 게 없다, 였는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였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모든 맺음에 대한 대답은 저도 그래요,였다. 물론 지금 들여다보면 아쉽고 고치고 싶은 부분들도 잔뜩 있지만 그땐 최선이었다고, 한치의 최선이어서 더 이상 최선을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그래서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한 곡이 끝나고, 책의 맨 뒷장을 덮는 그 순간은 끝인 동시에 끝이 아닌 순간이니까. 길을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카페 창가에 앉아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누군가의 듣고 싶은 음악, 읽고 싶은 한 문장이 되어 여러 사람들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앞으로 계속 살아있겠지. 무언가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여겼던 마음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나의 삶에 머물렀다 떠나간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있 .


출근길 아침, 지난 주말 우연히 들른 카페의 풍경 하나를 떠올렸다. 창에는 노란 꽃이 담긴 화이 놓여있고, 꽃잎 햇살이 말없이 내려앉은 풍경이었다. 창가 옆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손을 뻗어 꽃잎을 만졌을 때야 그것이 조화인 줄 알았다. 꽃을 업으로 하는 어떤 이는 조화는 꽃도 아니라고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것이 못내 아름다워 한참이나 줄곧 바라만 보았으므로 내겐 이미 훌륭한 꽃의 일을 해냈다. 살아있는 것들 마음을 빌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들을 만드는 나는, 내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어쩌면 평생 한번 스칠 일도 없는 이들의 마음을 빌려 살아갈 것들을 만드는 일이 때로는 크고 무겁게 느껴지므로, 마음이 크고 무겁게 느껴질 때면 그날 본 창가의 풍경을 떠올리기로 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것이 령 꽃 아름다움에 가닿을 수 조차 없는 조화라 하더라도, 오래 바라보고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에 남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꽃이 아니겠냐고. 그것 또한 내가 가진 훌륭한 최선이라고. 계속 만들다 보면 조화도 마침내 피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인생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5년 전 쓴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삶은 '다시'를 절대로 주지 않지만, '또 다른 계속'을 준다. 그러니 삶은 계속해서 아름다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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