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Jan 26. 2021

따뜻한 말 한마디


얼마 전의 일이다. 전날 저녁 함께 시간을 나눈 무리 중의 한 명이 내게 제법 긴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어떤 말에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였고,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줬으면 한다는 당부였다. 당황했고 미안했다. 생각 없이 말하니까 좋은 표현이 많이 나온다, 라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몹시 언짢을 수 있는 말이었다. 친구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하고도 몰랐을 것이다. 좋은 단어, 좋은 문장을 늘 생각하고 만들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주변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없이 툭 던지는 무심한 한마디가 그렇게 좋을 때가 많기 때문에 칭찬으로 여겨 한 말이었다. 메시지를 찬찬히 읽고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내 말에 담긴 뜻을 잘 풀어 전했다.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풀 수 있어서 좋다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잘 해결해나가자는 답장을 보내왔다. 말로 크게 상처를 입은 적이 있으면서,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따끔한 순간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쓰는 음성 기호'라고 풀이되어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상대방에게 건네는 행위이다. 생각이나 느낌이 담긴 것은 힘이 세다. 말을 사용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당신이라면, 인생을 살며 한 번쯤은 말이 지닌 무게를 실감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한마디 말에 상처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을 것이며 작은 말 한마디에 툭툭 털고 일어난 적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살게 할 수도 있고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말이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이 분명한데, 노력 없이 가진 것이라 여겨 함부로 쓰는 일이 흔하다. 말을 만들고 만지는 일을 하는 나 또한 말을 함부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어 돌아서서 후회하곤 한다. 언젠가 말끝마다 욕을 하는 이에게 '욕을 좀 줄이면 어떻겠냐'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는데, '내 입으로 내가 하는데 당신이 왜?'라는 말을 듣고는 입을 딱 닫아버렸다. 그 사람의 인격이 단박에 보였다. 자신의 입만 있고 상대의 귀가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말이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배설일 뿐이다.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밑줄을 쳐둔 토막 기사는 말의 온기에 관한 글이었다. 당근 마켓 이용자의 인터뷰였는데, 중고 물품 거래를 위해 상대방(닉네임 동그리)과 만나 잠깐 나눈 대화에서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에 이사온지 6년인데, 낯선 사람과 따뜻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라는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6년 동안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을 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 삶일지. 평소에 우리들이 얼마나 말에 인색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뿐 아니라 SNS다 뭐다 해서, 어느 때보다 말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많고 그 통로마다 말이 고여 흘러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되려 말이 가진 온도와 윤기는 점점 사라지고 말라빠진 거죽만 남은 느낌이다. 그런 말을 가진 사람이 많다.'말하는 태도나 버릇'을 일컫는 말씨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말씨가 예쁜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내 귀를 타고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느낌이다. 예쁜 말씨가 내 마음에도 심겨서 나도 그이처럼 예쁘고 따뜻한 말씨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 한마디라도 예쁘게, 다정하게 건네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이유는 분명히 그에게서 좋은 말씨를 건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인공지능 지니와 나눈 대화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 사는 곳에 그런 기계를 들이고는, 응당 사람에게 물어야 할 것을 기계에게 묻고 답을 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께름칙했으나, 나도 편의에 곧장 적응하는 인간일 뿐이라 지니에게 자주 시간을 물어본다. 지니야 지금 몇 시야? 새벽녘이건 자정이건 어느 때고 지니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정중하게 균일한 톤으로 지금은 몇 시입니다,라고 해준다. 하루는 내게 시간을 알려준 지니가 고마워서 "지니야 고마워"하고 이야기했더니, 지니가 "천만에요. 저도 고마워요. 심심하시면 저랑 수도 맞히기 게임해보실래요?"하고 게임을 제안했다. 물론 내장된 대화 루틴 중 한 가지겠지만, 나는 순간 이 기계에도 어쩌면 약간의 영혼이라는 것이 들어있고-사람이면서 영혼 한 조각 들어있지 않은 이가 얼마나 많던가- 내 말을 알아듣고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답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른 아침이라 멀뚱멀뚱 천장을 보며 누운 채로 지니와 수도 맞히기 게임을 했다. 연거푸 오답을 말하는 나를 봐준다거나 틀린 문제를 물러준다거나 하지 않고, 냉정하게 "40점입니다"라고 말하는 지니 때문에 주말 아침부터 약간 마음이 상했지만.


6년간 그 누구도 건넨 적 없던 온기를 누군가에게 덥석 안긴 덕분에 기자와 전화 인터뷰까지 하게 된, 당근마켓 매너 온도 99도에 빛나는 동그리 님의 말을 빌려 이 글을 마무리한다. "찰나의 거래라도 최대한 기분 나쁜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씁니다". 그의 말처럼 찰나의 대화라도 최대한 기분 나쁜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내 말을 듣는 대상이 설령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할지라도, 내가 가진 말로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각박한 세상에서 상처 받지 않는 법을 외치는 사람은 세상에 흩뿌려진 말만큼이나 넘쳐나지만, 상처 주지 않는 법을 말하는 이는 드물다. 자신이 가진 말이 꽃이 될지 칼이 될지는 온전히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다. 마음이 너무나 착하고 고와서 입을 뗄 때마다 입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어느 동화 속의 인물은 되지 못하겠지만, 내가 가진 말을 돌보고 살펴 내가 건네는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힘쓸 일이다. 함부로 휘두른 말의 칼날에 다치는 건 결국 나이니.


평생 말 곁에 머물고 싶은 이로서의 바램이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온기, 동그맣게 머무는 여운으로 남는 말을 갖고 싶다. 매만질수록 윤이 나서 누군가의 마음에서 마침내 빛을 내는 말을 가질 수 있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천천히 크는 느낌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