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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17. 2021

나는 천천히 크는 느낌이야


퇴근 후 늦은 저녁,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다. 잠시간 같은 직장에서 만났다는 인연으로 4년째 꾸준히 이어가는 모임인데, 하는 일도 성격도 나이도 저마다 다르다. 좀처럼 접점이 하나 없는 사람들끼리 매번 모일 때마다 '이 중에서는 내가 제일 정상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헐렁하게 낄낄거린다. 각자의 일상에 바빠 일년에 한두번 정도 만나 그간의 시간을 나누곤 하는데, 그때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꺼내놓는 각자의 계절을 들여다보며 이들의 몸과 마음이 또 얼마간 자랐구나 느낀다. 계절을 잊고 살아가다 문득 눈앞의 흐드러진 초록을 보고야 성큼 다가온 계절을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 때로는 누군가의 봄, 때로는 겨울,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한 자리에서 뒤섞이다 마침내는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가 되어, 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각자 품은 계절에 더해 얼마간의 온도가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그 온기의 여운이 의외로 인생의 곳곳에 남아 마음의 날선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아내는 걸 느끼곤 할 때마다, 함께 모여 만들어내는 적당한 온도가 저마다에게 맞춤하게 필요한 것이라 이 만남이 오래 유지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은 한 친구가 회사 생활로 인한 마음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여간 맞지 않는 후임과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느때보다 많이 야윈것 같았다. 우리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도 치다가 함께 욕도 해줬다가,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요령이 없냐며 친구에게 핀잔도 주었다가 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이 시기가 너에게 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함께. 대화의 끝에 친구는 "나는 천천히 크는 느낌이야, 가지를 치는 나무처럼"이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발음해봤다. 사람간의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는 일도, 너무 가까워졌다가 너무 멀어졌다 하며 더듬더듬 관계의 중심을 찾아나가는 일도 어렵지만, 나무가 잘 자라려면 가지를 솎아야하는 것처럼 친구에게도 가지치기가 필요한 시기가 왔구나. 출발에 앞서 운동화 끈을 매만지는 것처럼 잘 자랄 준비를 하는 친구의 태도가 기특하게 느껴졌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봤다. 요즘의 나는 겨우 삶이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 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예전과 비교해 나의 생활이 유달리 윤택해지거나 눈에 띠는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것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 위를 빙빙 배회하기만 하다 비로소 삶에 대한 점성, 혹은 약간의 무게를 가지게 된 느낌이다. 삶에 대해 몹시 서투른데다 잘 해보겠다는 의지도 없고,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도 없어서 잘 닦인 유리구슬 위를 번번이 미끄러지는 태도로 살았다. 삶에 대해 끈덕진 의지를 발휘하는 사람들, 버티고 견뎌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악착같다' '억척스럽다'는 몇 마디 말로 뭉개며 은근히 깔봤다. 내가 차마 가지지 못한,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였다. 나만 빼고 다들 아름다운 계절 속을 거닐고 있는게 아님을, 살만한 계절만을 안겨주는 삶이기에 애착하는 것이 아님을, 한참이나 지나 알게 된 어리석은 나는 이제서야 꽃잎 위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나의 무게를 삶에 가만가만 실어본다.


삶을 살아가며 저마다 맞이하는 계절이 있을 것이다. 삶의 계절은 기대하는 대로 순조롭게 펼쳐지기도 하지만, 예고없이 쏟아지는 비처럼 몸과 마음을 온통 적시기도 한다. 그럴 때 자신의 계절을 꺼내보일 수 있는 소탈한 자리 하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통과하는 중인지도 몰랐던 계절을, 다른 이들의 시선을 빌려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고, 때로는 그저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온기와 용기를 얻기도 할테니.

나는 나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홀로 있으면 꽃같고, 모여있으면 물결같다.

지난 가을, 나무가 가득한 숲을 거닐다 문득 적은 나무에 관한 한 문장처럼, 홀로 꽃처럼 아름답게 지내다 모여서는 물결처럼 서로의 어깨를 겯고 얼마간 너울거리기를. 각자의 계절을 성실히 살아내다가 언젠가 또다시 훌쩍 큰 몸과 마음으로 만날 시간을 기다린다. 서로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어서, 지나온, 그리고 다가올 계절들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만날 때마다 온기와 용기를 듬뿍 안겨주는 벗들에게 이 글로 선물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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