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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14. 2021

준 줄도 받은 줄도 몰랐던


황정은 소설가의 단편 <디디의 우산>은 빌린 우산과 오래된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민학생이던 디디는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마침 교실에 남아있던 도도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함께 하교를 한다. 도도의 집에 들러 도도를 데려다준 뒤 도도의 우산을 쓰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디디는, 다음날 잊지 않고 돌려줄 요량으로 우산을 잘 접어 현관에 놓아두지만 가족 중 누군가가 무심하게 쓰고 나가는 잃어버리는 바람에 우산을 돌려주지 못하게 됐다. 마음이야 다른 우산을 사주고 싶지만 변변한 우산 하나 조자 갖추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디디의 형편은, 그 뒤로 도도를 자꾸만 멀리하게 만든다. 그러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어린 얼굴들이 어른이 되어 마주 앉아 술잔을 부딪고, 도도는 그날 술집에서 우산을 잃어버린다. 디디는 도도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밀고, 자꾸만 사양하는 도도에게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꺼낸다. 돌려주지 못한 우산과 부채감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이 아주 흘러 도도가 건네받은 디디의 우산처럼, 삶을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무언가를 돌려받게 된다. 대부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준 줄도 모르고 주었던 것들이다. 사촌동생이 언젠가 꺼내 들려준 나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10년 전의 인연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문득 보내온, 내가 만들어줬던 선물 사진 같은 것 앞에서는 순간 말을 잃어버린다. 어제 밤늦게 걸려온 친구의 전화도 그랬다. 2년쯤 전에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 하룻밤을 잔 적이 있는데, 사람이 집에 오면 무조건 밥을 손수 해먹여야 한다는 시골 할머니 같은 철칙을 왜인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줄곧 갖고 있었던 나는, 밥을 짓고 집에 있는 배추를 몇 장 뜯어 버섯과 두부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주었다. 친구는 전화로 그때 먹었던 배춧국 얘기를 하며, 어떻게 그렇게 양을 딱 맞게 끓였냐며 너무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맛있게 싹싹 긁어먹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친구가 "화장실 쓰고 나서 불을 두 번 정도 안 꺼서 너한테 혼났다"는 얘기를 더하는 바람에 조금 머쓱해졌지만. 다른 이의 입을 타고 정의되는 나라는 사람을 들으면 (그토록 작은 일을 오래 기억해준 상대의 마음이 고마워) 머쓱하기도 하고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 같아서) 놀랍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배시시 웃게 된다. 어릴 때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스스로 고안해낸 방법이 여기저기에 500원짜리를 숨겨두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동전을 발견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겐 500원이 제법 큰돈이기도 한 데다 워낙 작은 것에도 잘 기뻐하는 성격이라 외투 주머니, 필통, 책상 서랍 속에서 동전 하나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주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잊었던 나의 마음들이 어떤 이의 기억 속에 별처럼 박혀서 줄곧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 될 때면, 잊고 있었던 500원짜리 동전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주고 나서 몰랐던 마음처럼 받고 나서도 받은 줄 몰랐던 마음도 있다.

내게 너무 많은 사랑을 준 이를 경계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참을 글썽이다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니 발등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장지에서 할머니 미안해요, 할머니 미안해요,라고 몇 번이나 말하다가 끝내 흙 한 삽을 못 펐던 나는 여전히 미안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2021년 1월 6일

외할머니는 나를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태어나서부터 그 사랑을 다 받았던 나는 그 사랑이 너무 당연해서 고맙고 귀한 줄 하나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나를 가만히 불러 지폐 몇 장을 쥐어주고는, 쓰리꾼이 돈 냄새 맡고 쫓아오니까 단단히 옷깃을 여미라고 거듭 주의를 주던 사람. 애를 낳았어도 진즉에 몇은 낳았을 나를 붙들고 '가스불 조심해야 한다' 하고 전화를 걸어 몇 번이고 이야기하던 사람. 내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서 얼굴을 거두지 않던 사람. 눈치도 없고 마음이 물러서 자주 사람에게 속고 혼자 화를 펄펄 내던 사람. 그 마음이 사라진 다음에야 한 사람이 갖기엔 너무 많은 사랑을 준 게 아닌가 싶, 시간이 흘러 그 마음을 차차 가늠할수록 무심결에 눈물을 흘리며 살 밖에. 외할머니의 마음뿐이겠나. 나의 경우에는 주고 나서 몰랐던 마음보다 받고 나서 몰랐던 마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어설프고 실수도 많은 사람이라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많은 이들이 내게 선뜻 건네준 마음들을 디디고 오늘까지 온 걸 비로소 안다. 깨진 유리조각을 치워주려고 내 방을 일일이 손으로 훔치던 작은 등, 북경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내게 선생님이 건넨 미키마우스 인형, 여행지에서 플랫폼을 찾지 못해 헤매는 내 손을 붙들고 기차 앞까지 데려다준 아주머니, 헤어지던 날 숙소의 통유리 너머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안안과 통통. 그들도 꿈에도 모르겠지. 어쩌면 기억조차 하지 못할 작은 행동이 내게는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떠올리다, 끝내는 눈물을 글썽이고 마는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버린 걸. 준 줄도 모르고 받은 줄도 몰랐던 그런 마음들이 세상을 떠돌다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박혀 언제까지고 빛난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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