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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12. 2021

눈 오는 날


눈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워낙 비나 눈이 귀한 곳에서 자랐기에 눈삽이라는 걸 서울 와서 처음 봤다. 집집마다 눈을 쓰는 풍경이 신기해 골목 어귀에서 한참을 바라봤던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인생에서 가장 눈을 많이 본 시기는 유학시절이다.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은 중국의 끄트머리에서 유학을 했다. 늘 길가엔 눈이 쌓여있었고 기숙사를 나서기만 해도 추위에 찔끔 나온 눈물이 금세 얼어버릴 정도의 맹렬한 추위를 자랑하던 곳이었다.길가에 아이스크림을 깔아놓고 팔 정도. 그때는 몸과 마음이 고루 외롭고 어둡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넘겨버리곤 한다. 몸의 추위가 아니라 영혼의 추위가 나를 덮쳐왔던,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시간들. 그때의 눈도 기억 속에서 재빨리 녹여버리고 나면, 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정말로 없다.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아아'를 외치는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이나 몇 해전에 읽은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정도.


그래도 눈이 내리면 왜 이렇게 반가운 마음이 들까. 눈이 내리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눈 온다"라고 담백하게 알려주고 싶다. 눈이 와서 네 생각이 났다는 구구절절한 마음은 뒤로 숨기고. 골목 귀퉁이, 혹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서있는 눈사람을 보면 괜히 웃게 되니 나도 쉬는 시간을 이용해 회사 옥상에 올라가 뭐라도 만들어본다. 소복한 눈밭을 심술궂게 발자국으로 어지럽히기도 하고, 눈을 꼭꼭 뭉쳐 공을 만들어 저 멀리 던져보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주워 눈사람 입에 물려주기도 하면서 논다. 요즘은 눈오리 집게가 유행이라기에 나도 하나 사볼까 하는 참이다. 아, 지금 글을 쓰면서 눈에 대한 작은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서울에 올라와서 입사한 직장은 출판사였는데, 작은 규모의 출판사인 데다 워낙 성격이 독특한 곳이었다. 내가 면접을 볼 때는 책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대표님의 질문도 있었다. 모인 사람들도 독특했다. 내 또래의 편집자와 디자이너 선배가 하나 있었다. 둘은 술을 무척 잘 마시고 나는 아예 술을 못하니 둘은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고, 가끔 셋이서 어울리면 둘은 아주 거나하게 취해있고 나 혼자 맨 정신에 모든 걸 기억하는 순간이 자주 연출되었다. 그날은 독자 행사를 마친 다음이었던가, 상수역 근처의 2층에 있는 술집에서 셋이서 술을 마시는데 마침 눈이 내렸다. 벽면 하나가 죄다 창인 곳이라 창을 살짝 열어 창밖으로 손을 뻗으니,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주인이 창을 활짝 열어주었다. 찬바람이 휑하니 들어왔는데도 다들 눈 내리는 풍경에 취해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찍힌 사진 속의 나는 머리가 노란색이고 편집자와 어깨를 고는 쑥스럽게 웃고 있다.


쓰다 보니 눈에 대한 추억이 또 떠올랐다. 할머니 집이 강원도라 겨울에 눈이 펑펑 오는데, 그해는 눈이 무릎까지 왔다. 한걸음 한걸음 디딜 때마다 정말로 무릎까지 푹푹 잠겨서 나는 그 질감이 생경해 자꾸만 걸었던 것 같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겨울에도 눈 소식이 드물었고, 간혹 눈이 오나 싶다 가 공기 중에서 먼지처럼 흩날리다 금세 사라져 버렸으니. 눈을 헤치며 열심히 걷다 까염소를 만났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니 도망도 못 가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염소는 겁에 질린 눈앞의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을 하는 중이었는지, 나를 몇 초간 빤히 보다가 아주 가볍게 통통 뛰어 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첫 문장이 무색하게 또 하나의 기억이 지금 생각났다. 한때 티 모임을 열심히 나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또래의 여자아이와 금세 친해졌다. 대부분 수더분하게 입고 다니는 나와는 다르게 레이스가 하늘하늘한 공주 옷을 좋아하는 예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어느 날 문득 설악산인지 태백산인지 눈꽃축제를 보러 가자고 말을 꺼냈고, 인터넷에서 싸게 파는 당일치기 패키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단체 관광버스를 타고 새벽 일찍 산으로 떠났다. 이 글에 실린 사진은 그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다. 올라가다 풍경이 예쁜 곳에 멈춰 서서 나 한번, 너 한번 이렇게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와는 아주 시시한 일을 계기로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데, 내 생일날 친구가 차를 사주겠다며 어디 찻집에서 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당연히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창밖이 보이지 않는 게 싫어 습관처럼 버스를 타버린 나는 그날 아마 40분인가 50분이나 지각을 했다. 친구는 그래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조잘조잘 작은 이야기를 나눴다. 가게를 나설 때쯤 친구가 찻집에서 산 차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고맙게 받아 가방에 넣어놓고는 며칠 뒤에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마침 생일이라는 걸 알고 가방에 있던 차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친구는 SNS를 통해 자신이 선물한 차를, 내가 다른 이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크게 화를 냈다. 그때 나는 미안한 마음보다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커서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받은 선물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딘 마음이다. 나를 불러 따뜻한 차 한잔을 사주던 친구의 마음을 몇 년이나 지나버린 이제야 헤아린다. 얼마나 섭섭했을지.


지금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가족들이 모여있는 단톡 방에 아빠가 '공주야 눈. 마니마니?'라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엄마는 조심해서 퇴근하라는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나 오늘을 돌아보면 옥상에서 혼자 눈사람을 만들고 담배를 물리며 깔깔대던 내 모습이 눈과 함께 떠오르겠지. 회사의 누군가로 인한 답답한 마음에 올라간 옥상인데, 눈사람을 만드느라 화도 잊고 잠시 동안 즐거웠다. 눈, 하고 발음하면 곧바로 떠올릴만한 대단할 추억은 없지만, 지나고 나니 아주 작은 눈송이 같은 기억들이 녹지도 않고 내 마음 한편에 쌓여있다는 걸 알았다. 한때 나와 함께 눈을 바라봤던 사람들은 이제 연락이 닿지 않지만, 다들 어디에선가 눈을 바라보며 이 겨울을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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